젤림한 하라초예브스키
"관리들은 산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 아브레크는 관리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 A. 세리포프
카자흐스탄으로의 강제이주에서 1957년 돌아온 체첸인들은, 가장 먼저한 것은 묘지를 복구하는 것이었다. 소련군은 체첸인들을 강제 이주하면서 그들의 조상들의 묘석들을 뽑아서 길가의 보도블럭으로 만들거나 다리를 만들거나 돼지우리 바닥으로 깔았다. 자신의 7대 조상까지 인적사항을 암기하는 체첸인들에게 조상에 대한 이러한 처사는 가장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그들은 묵묵히 묘석을 파다가 다시 무덤을 만들었다.
소련은 산민들의 귀향을 허락했지만, 산민들의 토착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그들을 모범적인 사회주의 시민으로 거듭나게 하려고 하였다. 1958년, 소련 정부는 코카서스 지역의 모국어 교육을 금지시켰으며, 산민들은 원하는 지식을 러시아어를 통해 배워야 하였다. 또한 소련은 이슬람교의 존재를 인정치 않았다. 아랍어의 교육도 금지되어 있었으니 이슬람교 지식을 접할 방도가 없었다. 모스크는 파괴되었고 이슬람 신학자들은 체포되고 처형당했다.
이런 작업에 힘입어, 20세기 중반이후 수십년 동안 체첸 지역에서는 과거와 같은 일제 봉기는 없었다. 소련은 자신들이 갈망하던 '평화롭고 안전한 코카서스 확보'가 달성됬다고 생각하였다. 코카서스 지역은 사회주의의 모범적인 정착지로 언급되었고, 세계적인 장수촌이자 매우 아름다운 경관을 가진 코카서스 산악지대는 공산당 간부들의 휴양지로 거듭났다. 그로즈니의 여행 엽서에는 이런 문구가 써있었다. '그로즈니로 놀러오세요. 매년 그로즈니는 새롭게 개발되고 있으며 넓은 도로가 현대적인 빌딩들 사이에 시원하게 놓여있습니다.'
그러나 체첸인들은 러시아 정부가 그들의 종교와 모국어를 금지했음에도 굴하지 않았다. 1989년의 체첸의 언어 사용을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99.8퍼센트가 체첸어를 모국어로 썼으며, 73퍼센트가 러시아어를 제 2외국어로 쓸 수 있었다고 한다. 전국민의 무려 70퍼센트 이상이 2개국어를 사용 가능했다. 그러면서도 체첸어의 명맥도 끊이지 않게 하였다.
수피즘의 의식은 집집마다 비밀리에 행해졌으며, 그들의 특징적인 춤 '지크르'도 소련당국의 눈을 피해 전해졌었다. 스탈린의 강제 유형 속에서도 살아남은 수피즘 형제단의 계보는 계속 이어졌으며, 소련 정부에 대한 저항의식도 계속 살아남았다. 다게스탄 기관지인 '소비에츠키 다게스탄'에 1973년 이런 기사가 올라왔다.
"최근 들어, 과거 제국주의 반동 세력 중에 소비에트 연방에의 통합을 음해하는 이론을 주창하고 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소비에트 정부는 신의 뜻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신의 버림을 받았으며 정부에 불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허무맹랑한 소리가 체첸과 다게스탄의 몇몇 무리드에 의해 퍼지고 있다."
또한 소비에트 정부의 공식적인 보고에서는 체첸은 평화로운 정착지로 묘사됬지만, 실상은 그와는 많이 달랐다. 1966년 국가보안위원회 (KGB) 의장 블라디미르 세미차스티가 중앙 공산당 위원회에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체첸 - 잉구쉬의 인텔리겐챠와 청년들 사이에서 잦은 유혈 사태가 벌어지며, 소련의 민족정책과 공산당 이념에 반하는 반소 정서가 확산되고 있다고 하였다. 특히 체첸과 잉구쉬인들 사이에는 공화국에 거주하는 다른 민족에 대한 적개심이 심하며, 그 대상은 대부분 '러시아인'이라는 것이다.
즉 체첸인들의 저항정신은 그들의 핏속 깊숙이 존재했으며, 언제든지 발화점만 찾으면 폭발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다만 그들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리하여 소비에트 정권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과거와 같은 전면적인 일제 봉기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소련이 생각하는 평화로운 코카서스는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조용히 시기를 기다릴 수 없었던 산민들도 있었다. 바로 아브레크 (Abreg) 였다. 오세티야 어로 '도적'을 뜻하는 아브레크는 코카서스 전역에 존재했던 도적들이었다. 대개 살인의 죄를 저질러서 마을에서 추방당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지배 하에서는, 특히 체첸에서는 식민 통치를 하는 관료를 대상으로 도적질을 하였다. 심지어는 식민 지배 시스템을 교란하려고 까지 하였다.
아브레크는 문자그대로 도적들이었다. 그들의 삶의 방식은 결코 평화로운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피를 보는 것을 꺼리지 않았고, 훔치고 약탈하고 인질을 잡고 몸값을 받고 풀어줬다. 그러나, 그들은 제정 러시아와 소련의 지배하에 신음하는 산민들 중에서, 그 지배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기도 하였다. 체첸지역의 역사가였던 세리포프는 이렇게 표현하였다.
"관리들은 산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 아브레크는 관리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이들은 체첸 지역에 봉기가 없었던 시절에도 꾸준히 존재하며 러시아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가장 유명한 아브레크는 젤림한 하라초예브스키였다. 그의 이름은 체첸 지역을 넘어 코카서스 전역으로 퍼졌고, 러시아의 중앙 일간지까지도 강타하였다. 1872년 베데노 지역에 태어난 젤림한은 1901년, 러시아인을 죽인 죄로 감옥에 갇혔다. 그 감옥을 탈출한 뒤, 그는 평화로운 삶을 영원히 접어버렸다.
젤림한과 그 부하들
. 1905년 10월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러시아가 어수선한 틈을 타서 일어난 체첸인의 봉기를 러시아는 가혹하게 진압하였다. 그로즈니 시장에서 러시아군에 의해 17명의 체첸인들이 사살되었다. 젤림한은 일주일 뒤, 카디 유르트를 지나는 기차를 급습했다. 거기서 승객 중에 러시아인들의 재산을 약탈한 뒤, 러시아군 장교, 관리, 코사크 병사들 17명을 사살했다. 그로즈니 학살에 대한 보복이었다.
젤림한의 죽음
1906년 4월에는 그로즈니 지역 러시아군 장교를 죽였다. 1908년에는 아브레크를 잡으면 이마를 쏴서 죽이라고 명령했던 베데노 지역 러시아군 대령의 이마를 쏴서 죽였다. 그에게는 불가능이란 없었으며, 지역인들에게는 영웅처럼 추앙받았고, 수피즘 카드르 교단의 지도자들도 그와 비밀리에 연락을 취했다.
한번은 젤림한은 키즐레이에 있는 러시아군 요새에 편지를 보냈다. "여자처럼 뒤에서 숨지마라. 키즐레이에서 나랑 만나자." 러시아군 장교들은 비웃었다. "이놈이 요새에 뭔 수로 들어오려고?" 하지만 젤림한은 자기 부하 60명과 함께 코사크 병사로 위장하고 요새에 들어와서 은행을 털어버렸다. 그 다음에 쪽지를 남겼다. "몸소 여기까지 와서 기다렸는 데, 어디갔었나?" 1907년의 일이었다.
그의 목에 현상금이 붙기 시작하였고, 5천루블에서 출발한 현상금은 10만 루블까지 올라버렸다. 그를 체포하기 위해 북코카서스 러시아 사령관은 3개 연대, 200명의 코사크 기병을 동원하였지만 그는 항상 교묘하게 빠져나갔다.
현재 체첸 반군들에게 붙은 현상금
그가 '무법자'의 길에 들어선지 10년이 넘는 1913년, 마침내 꼬리가 잡혔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살리 지역의 친척집에 숨어들은 젤림한은 러시아군이 집 주변을 포위한 것을 깨달았다. 친척이 밀고한 것이다. 1913년 9월 27일, 젤림한은 치열한 전투 끝에 러시아군에게 사살되었다.
젤림한의 죽음은 러시아에게는 오랬동안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었지만, 그것이 아브레크들의 끝이 아니었다. 러시아 제국의 붕괴와 소련의 성립, 2차대전 때까지 아브레크들은 계속 존재하면서 러시아 정부의 골치가 아프게 만들었다. 그러나 소련 정부의 힘으로 하나둘씩 사라졌다.
하스하 마고마도프
최후의 아브레크는 하스하 마고마도프였다. 1905년 베노이 출신의 마고마도프는 1939년부터 아브레크가 되었다. 마을 주민을 죽인 죄로 피의 복수를 면하는 대신에 추방당한 것이다. 그는 1944년, 스탈린의 강제이주로 모두 추방당한 것을 알게 됬을 때, 그것을 기뻐하고 잔치하는 러시아인 41명을 죽여서 보복하였다. 그리고 계속 산에서 숨어있으면서, 1955년까지 155번이나 소련 정부를 공격하고 도적질을 하였다. 그는 소련 정부에게 대항할 용기가 없던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며, 몇번이나 체포되고 사살될 위기를 모면하면서 무려 40년 가까이 아브레크 생활을 하였다.
마침내 1976년 3월, 이제 70살이 넘은 마고마도프는 자신의 살날이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산에서 내려와 자신이 추방당했던 베노이의 묘지에 나타난 마고마도프는 그곳에서 자신의 운명을 기다렸다. 소련 정부는 오랬동안 찾아해맸던 도적이 마을에 나타났다는 보고를 듣고 즉시 출동하였다.
사살된 하스하 마고마도프
마고마도프는 수십년간의 산악지대에서 숨어살았기 때문에 거의 빈사상태였다. 몸무게가 불과 38킬로그램 밖에 안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체첸의 최후의 아브레크는 죽기 전에 KGB 장교 1명과 병사 몇명을 같이 데려갔다.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고향 묘지에서 죽었다.
기본적으로 아브레크는 도적떼였으며, 그들이 한짓은 범죄였다. 그러나 임꺽정이나 로빈후드처럼, 사람들은 탄압하는 권력 하에서 저항하는 자를 영웅시하게 된다. 제정 러시아와 소련의 지배 하에서, 아브레크의 활동은 비록 그것이 범죄였지만 권력을 대상으로한 공격으로 받아들여졌고 '의적'이 되었다. 또한 그들의 활동은 영웅담처럼 코카서스 전역에 널리 퍼졌다.
출처 : http://www.chechen.org/content.php?catID=7&content=335
http://www.selard.com/
http://72.14.235.104/translate_c?hl=ko&sl=ru&tl=en&u=http://abrek.at.ua/publ/54-1&usg=ALkJrhhDwkEjWRZAuamTW6qe_EbpVLnCSg
http://findarticles.com/p/articles/mi_6976/is_2_8/ai_n28449550/pg_1?tag=artBody;col1
http://en.wikipedia.org/wiki/Abr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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