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전쟁의 핀란드군
1939년 11월 30일, 소련은 핀란드를 침공하였다. 레닌그라드의 안전을 위해 핀란드 남쪽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핀란드는 만네르하임 원수 하에 120만에 달하는 소련군의 대공세를 버텨냈다. 소련군은 랩랜드의 혹독한 겨울을 이용한 핀란드군의 전술에 조각조각 파괴되고 있었다. 전세계의 눈앞에서, 소련의 군사적 무능함이 낱낱이 드러나고 있었다.
핀-소 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 1월, 체첸 공산당 지부에는 한통의 문서가 전달되었다.
"나는 우리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의 주모자가 되고자 한다. 나는 체첸과 잉구세티아 뿐만 아니라 코카서스 전체의 힘으로도 붉은 제국의 손아귀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정의에 대한 우리의 확고한 믿음, 자유를 사랑하는 코카서스인과 전세계인들의 확고한 지지를 믿기에, 역사 발전의 마지막 한발자국을 내딛기로 하였다.
용맹한 핀란드인들은 거대한 노예 제국이 자유를 사랑하는 소국의 앞에 무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코카서스에서 당신들은 두번째 핀란드를 보게 될 것이며, 다른 핍박받는 민족들이 우리의 뒤를 따를 것이다."
그것은 핀란드인들의 저항에 고무된 체첸인들이 러시아에게 보내는 선전포고였다. 이 대담한 선포의 주인공은 30살의 젊은 변호사인 하산 이스라일로프였다.
1910년에 갈란쵸 지역에서 태어난 이스라일로프는 지역의 공산당에 가입하여 모스크바의 대학까지 다녔다. 문학쪽에 소질이 있었던 이스라일로프는 모스크바의 '노동자 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했는 데, 그의 기사들은 대부분 체첸 지역에서의 소련 공산당 지부의 탄압과 착취에 대한 성토였다. 검열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하는 선에서, 이스라일로프는 코카서스 지방의 소련의 통치에 대해 비판하였고 지역 통치 간부들의 횡령과 비리에 대해 비판하였다.
그러다가 1935년, 북코카서스의 소련 정부에 대해 항거하는 내용의 연판장이 발견되었고, 하산 이스라일로프의 서명도 발견되었다. 그는 체포되었고 10년의 강제노동형을 선고받았다. 4년 뒤인 1939년, 그를 기소하고 고발했던 사람들이 검거되자 이스라일로프는 사면되고 체첸으로 돌아왔다. 그는 샤토이 지역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게 된다.
핀란드와 소련의 전쟁은 핀란드의 영웅적인 항거, 혹은 소련의 믿을 수 없는 무능으로 인하여 소련군의 피해가 막심하였다. 이 전쟁을 독립의 호기로 삼은 이스라일로프는 1940년 2월에 동생 후세인과 함께 체첸 남동부 산악지대에 게릴라 기지를 건설하였다. 그들은 체첸의 각지역에서 지원자를 모집하고 무기, 식량 등을 비축하는 작업을 통해 봉기를 계획하였다. 1941년 여름, 하산 이스라일로프는 휘하에 5천의 게릴라 요원과 2만 5천이 넘는 동조자들을 모았으며, 체첸의 주요 도시인 그로즈니, 구데르메스, 잉구세티야의 말고벡 등을 중심으로 5개 군사 지역구를 편성하였다. 봉기 시점은 1941년 가을로 잡았다.
코카서스 지방의 봉기 정보는 소련과 전쟁 중인 독일 첩보부에도 알려졌으며, 때마침 '청색 작전'을 통해 볼가강의 수운과 그로즈니, 바쿠의 유전을 장악하려 했던 독일군으로서는 적군 후방 교란의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즉시 하산 이스라일로프와 접촉을 시도함과 동시에 체첸 - 잉구쉬 지역에 첩보원을 침투시켰다. 80명에 가까운 요원들이 1943년 8월까지 독일 첩보부 아프베르에 지령을 받고 숨어들었다.
청색 작전의 독일군 진격 범위
하산 이스라일로프는 독일군의 작전 시점에 맞춰서 봉기하여 최대의 효과를 보려고 하였지만, 각 지역에 흩어진 조직들 사이의 연대가 느슨했고 독일군의 공세가 생각보다 미약하여 원했던 타격은 주지 못했다. 거기에 독일과 교섭해본 결과 독일 역시 또다른 침략자라는 것을 알게된 봉기군 측은 1942년 말에 "만약 코카서스의 해방이 식민지에서 또다른 식민지로의 전환에 불과하다면, 이는 또다른 투쟁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선언을 하였다. 이스라일로프와 독일 아프베르의 협상은 결렬되었다.
기대했던 봉기의 봉화를 올리는 데는 실패했지만, 각지역의 세포조직은 나름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1941년 말의 시점에 체첸의 250개의 마을에는 각각 7명에서 15명의 반군이 암약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사보타주를 시작한 1942년 여름 이후로는 체첸 지역에서 80명이 넘는 소련 공산당 간부들이 도피했다고 한다. 그 중에는 16명의 지역 공산당 의장, 8명의 집행 위원장, 14명의 공동농장 책임자가 포함됬다고 한다. 이들은 지역의 소련 공산당을 대표하는 자들이었지만, 그들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소련군은 체첸의 반군들을 토벌하기 위해 1942년 봄에 산악지대에 두차례의 공중 폭격을 가했다. 하지만 반군들은 상처없이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소련군은 이들을 색출하고 처형하기 위해 비밀 경찰 (NKVD)를 통해 수색하였고, 이스라일로프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다음의 규칙을 정했다. "믿을만한 보호자의 경호가 없는 한 집이나 마을에서 밤을 보내는 것을 엄격히 금지한다." 이 조치는 비밀 경찰의 숙청에서 오랬동안 살아남는 데 큰 효과를 발휘하였다. 산악지대의 반군을 제압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웠기 때문이다.
체첸 반군과 매우 유사했으리라 생각되는 벨로루시 빨치산
스탈린은 체첸인의 저항 정신에 대하여 넌더리를 냈고, 인내력의 한계를 느꼈다. 하산 이스라일로프의 반란으로 1만 2천명에 달하는 소련군과 비밀경찰, 공산당 간부들이 사살되었다. 심지어 그로즈니 군사학교를 기습하여 사관 생도 200여명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이런 진절머리 나는 민족 때문에 더는 고생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았다. 민족 전체를 송두리째 살던 터전에서 뽑아버리고 시베리아로 강제이주 시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1943년 말, 체첸 그로즈니에 와있던 베리야의 보고서에 처음 언급되었다. 계획에 따르면 '나치 파시스트와 동조한 북 코카서스 반역자'들을 대상으로 하였고, 체첸과 잉구쉬 외에도 카리치인, 발카리아 인들도 포함되었다. 1급 기밀로 분류된 이 계획은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며 면밀하게 짜여졌다. 산악민족들을 뿌리채 뽑아내는 일은 신속하고도 실수없이 이뤄져야 했기 때문이다.
1944년 2월, 소련군과 비밀경찰들이 체첸과 잉구세티아 지역에 나타났다. 미국제 트럭을 앞세운 그들의 숫자는 무려 12만에 달했다. 지역 공산당 기관지에서는 '우리의 친애하는 붉은 군대를 위해 따뜻한 환대와 위로를 아끼지 맙시다' 라는 기사가 올라왔다. 그들은 전역의 마을에 분산됬으며, 마을 어귀에 배치되었다.
운명의 1944년 2월 23일, 체첸과 잉구세티아의 소련군은 마을 각지에서 일제히 파티를 하였다. 모닥불을 피우고 노래를 하면서 잔치를 하였고, 마을 사람들을 '모두' 초대하였다. 산민들을 별다른 의심없이 마을 회관이나 공터 등에 모여들었다. 갑자기 소련군은 주민들을 둘러쌓은 다음에 준비했던 트럭으로 전부 밀어넣었다. 산민들은 소련군이 왜 쓸데없는 미제 트럭을 그토록 많이 갖고 왔는 지를 비로소 깨달았다. 그들을 모두 강제 이주시키기 위해서였다.
화물 열차에 타고 있는 체첸인들
이 기습적인 강제 이주는 체첸과 잉구세티아의 모든 마을에서 일제히 이뤄졌고, 불과 2-3 시간만에 끝났다. 일부 산민들은 이런 와중에도 무기를 들고 저항했지만, 만반의 대비를 한 소련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소련군의 진압은 참혹했으며, 조금이라도 반항하려는 산민들은 가차없이 처형하였다. 샤토이 지역의 카이바흐 마을에서는 700명의 체첸인들을 거대한 마구간에 가둬버리고 불태워 죽여버렸다.
너무도 순식간에 이뤄진 강제 이주로 인해 산민들은 거의 아무것도 손에 들지 못한채 시베리아로 끌려가야 했다. 그 수는 체첸인 39만명, 잉구쉬인 9만명, 카라치인 7만명, 발카리아인 3만 7천명이었다. 체첸인의 강제 이주에는 아무런 예외를 허용치 않았고, 소련군의 군복을 입고 독소전쟁에 싸운 3만명의 체첸인들도 시베리아로 떠나야 했다. 이들은 놀라울 정도의 감투정신을 발휘하였고, 56명의 '소련의 영웅' 훈장을 수여받았다. (소련군 전체의 평균보다 3-4배나 높은 비율이다.) 그 중에는 독일군 349명을 저격한 아부하지 이드리소프라는 탁월한 저격수도 있었다. (소련군 전체에서 13번째로 많은 저격수다.) 그러나 이드리소프조차 다른 체첸인들과 함께 카자흐스탄으로 끌려가야 했다.
훈장을 수여받는 아브하지 이드리소프
- "나는 죽지만 항복하지 마라! 안녕 조국이여!" 라는 낙서로 유명한 브레스트 요새에서 전멸한 소련군 중에 300명이 체첸과 잉구쉬인이었다고 한다.
인구 49만명을 강제 이주시키기 위해 12만의 군을 배치한 소련은, 산민들을 시베리아로 끌고가면서 그들의 처우에 대해서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 산악길을 미제트럭으로 통과한 뒤, 그들은 화물열차에 꾸역꾸역 밀어넣어진 채 시베리아 카자흐스탄으로 옮겨졌다. 혹한의 날씨에 이뤄진 시베리아 유형은 엄청난 희생자를 낳았다. 유형 중에 나이가 든 노인이나 부녀자, 갓난 아기들의 경우는 대개 얼어죽거나 영양 실조로 죽었다. 몇주에 걸친 긴 유형 동안 중간중간에 시체를 파묻거나 버리면서 가지 않으면 안됬다.
이 유형 기간 동안에 죽은 체첸인의 숫자는 정확한 통계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대개 25퍼센트에서 30퍼센트의 체첸인과 잉구세티아인들이 유형 도중이나 유형지에서 숨졌다고 본다. 한 민족의 전체의 3분의 1에서 4분의 1이 사라져버렸다. 현대전에서 '전멸'이라는 소리를 듣는 전투의 사상자가 보통 30프로라고 본다면, 이는 엄청난 숫자였다.
유형 중에 죽은 여자와 어린이
그러나 이 세밀하게 준비된 계획과 철저한 시행에도 불구하고, NKVD의 보고서에 의하면 6540명의 체첸인과 잉구세티아인들이 산악지대에 남아서 투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주민의 협조, 아니 협조할 주민조차 없는 게릴라전은 효과적일 수 없었다. 1944년 3월에 베리야에게 보고된 비밀경찰의 자료에 의하면, 2400명의 반군들이 체포 또는 사살됬으며, 5천정의 소총과 470정의 기관총과 기관단총을 노획하였다. 불과 한달도 안되서 3분의 1에 달하는 반군들이 제압당했다.
하산 이스라일로프는 자신에게 보급과 은신처를 제공해줄 주민들이 모두 사라졌음에도 무려 10개월을 더 산악지대에서 투쟁할 수 있었다. 이 기간 동안에 그가 어떤 활동을 했는 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러시아 정보국에서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단지 1944년 12월 29일, 그로즈니의 비밀경찰 책임자였던 드로즈도프가 직속 상관에게 보낸 다음의 전문을 통해 유추해볼 뿐이다. '베리야 동무가 부여한 임무가 완수되었습니다. 하산 이스라일로프는 사살되고 그의 시체는 확인 절차를 거쳤습니다."
그로즈니의 강제 유형의 희생자 묘지
이스라일로프는 1944년 12월 말에 죽었지만, 체첸 지역의 게릴라 활동은 1953년까지 계속되었다. 이미 처음 봉기의 의지를 불러일으켰던 핀란드는 3달 만에 소련과 강화조약을 맺고, 한때 그로즈니에서 100킬로 바깥쪽까지 진격했던 독일 나치 정부는 이미 소멸되고, 그들을 동조하고 지원해주던 주민들은 모두 카자흐스탄으로 사라졌고, 주요 간부들은 모두 처형되거나 변절되는 속에서도 반군들은 10년 가까이 산속에서 버티면서 싸웠다.
스탈린에 의해 강제 이주된 체첸인들은 카자흐스탄에 방치되었으며, 그들의 거주 이전의 자유는 허락되지 않았으며 비밀경찰의 감시하에 놓였다. 익숙치 않은 시베리아 환경에서 수도 없이 많은 산민들이 죽었다. 그들의 비극은 흐루시초프의 1956년 공산당 전당대회 발언 때 처음 언급됬으며, 1957년에 귀향이 허용되기 까지 게속되었다.
그러나 민족 전체가 오직 체첸인이기에 당해야 했던 수난의 기억은 그 뒷세대에게 결코 잊혀지지 않았으며, 아직까지도 그 한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2008년 2월 23일, 그로즈니의 강제 유형 묘지에 참배하는 체첸인
출처 : http://www.amina.com/article/deport.html
http://www.amina.com/article/fort_begn.html
http://www.amina.com/article/exile.html
http://www.chechnyafree.ru/en/article.php?IBLOCK_ID=347&SECTION_ID=582&ELEMENT_ID=58160
http://www.chechnyafree.ru/en/article.php?IBLOCK_ID=352&SECTION_ID=697&ELEMENT_ID=71328
http://en.wikipedia.org/wiki/Hasan_Israilov
http://www.history.neu.edu/fac/burds/Burds-FifthColumnists.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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