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읽 기/불굴의 용기

[스크랩] 코카서스의 늑대들 : 체첸 - 11. 평화주의자

공만타 2009. 11. 26.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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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저들이 우리에게 교회를 가라고 하면, 가십시요. 단지 벽돌더미일 뿐입니다. 만약 저들이 십자가가 그려진 성복을 입으라 하면, 입으세요. 단지 헝겁조각일 뿐입니다. 그러나! 만약 저들이 우리 여자들을 겁탈하고, 우리의 언어, 문화 그리고 전통을 앗아가려고 한다면, 최후의 한 사람까지 저항하십시요!  민족의 자유와 긍지는 그들의 언어, 문화, 전통, 우애와 상호 용서, 고아와 과부들에 대한 배려, 그리고 마지막 빵 한조각이라도 나눌 수 있는 인정입니다.

 

                                                                                                       - 쿤타 하지 키시예프

 

 

 

  샤밀이 구니브에서 항복한 것은 1859년이었다. 이 시점은 최후의 이맘이 포로가 된 때이기 때문에 코카서스 동쪽의 투쟁의 동력은 꺾어져 버렸다. 그러나 수십년 동안의 항쟁이 바로 잠잠해질 수는 없었다.

 

  러시아는 산민들을 험한 산악지대에서 북쪽의 평야지대로 이주시키려고 하였다. 일단 평야지대에 지내게 되면 통제하기가 쉽고, 보다 더 온순해질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산민들은 이에 반항하였고, 1860년 5월, 베노이에서 시작된 반란은 아르군과 중부 산간지대를 통해 확산되었다. 러시아군은 계속해서 지긋지긋한 게릴라전을 감당해야 했고, 1861년 말에야 이를 진압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러시아 정부는 1862년, 체첸과 다게스탄의 반란이 모두 진압되었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
 

  마침내 제정 러시아는 코카서스 일대를 자신의 발 아래 굴복시켰다. 이반 뇌제가 카바르다 족장의 복속을 받은 1557년으로부터 300여년, 세이크 만수르가 코카서스의 항쟁을 부르짖은 1785년으로부터 80여년 이었다. 러시아는 이 지긋지긋한 산민들의 저항에 넌더리를 내면서, 두번 다시 러시아에 저항하지 못하게 하는 근본적인 대책을 생각하였다.

 

  우선 회유책을 생각하였다. 과거 산민들이 저항하던 초기에 상대를 쉽게 보고 힘으로 억압하려다 더 큰 봉기를 불러일으켰던 경험을 상기했던 것이다. 구니브를 함락시킨 1859년, 체첸에는 다음과 같은 포고문이 붙었다.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포고한다.

 

    (1) 러시아 제국은 산민들이 선조에 경의를 표할 자유를 절대적으로 보장한다.

    (2) 산민들은 러시아 군이나 코사크 기병에 복무할 것을 강요받지 않는다.

    (3) 산민들은 본 포고문이 공표된 시점으로부터 3년간 세금이 면제되며, 그 뒤에는 한 가구당 3루블의 세금을 낸다. 다만 마을 단위로 세금의 분배를 상의할 수 있다.

    (4) 산민들을 통치하는 행정 조직은 관습법과 샤리아에 따라 권한을 행사한다. 사법부가 조직되며 재판은 산민들 중에 선출된 배심원에 의해 행한다.

 

                     
                                                                                 러시아 코카서스 주둔군 사령관 바랴틴스키

 

 
    즉, 러시아 제국은 산민들에게 상당히 많은 배려를 하게 된 것이다. 특히 종교의 영역에서 산민들에게 그리스 정교를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또한 이제 막 병합이 끝난 코카서스 지역에 정상적인 정부를 꾸리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에 군정을 실시하였고, 샤밀 휘하에서 러시아에 항복한 '나이브'들을 통해 각 지역을 운영하게 하였다. 다만 점차로 러시아 출신으로 행정관들을 교체하여 갔다.

 

   러시아 정부는 이 회유책에 병행하여 산민들의 절대수를 줄이는 정책도 시행하였다. 독실한 무슬림이라면 생애 한번은 메카를 순례하여야 했다. 이를 '하지'라 부른다. 러시아 정부는 산민들에게 터키를 거쳐 메카로 갈 수 있는 여권을 적극적으로 발급하였다. 이 여권에는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왕복이 아닌 편도였던 것이다. 거기에 러시아는 터키와 협상을 하여 메카로 순례를 떠난 체첸인들이 대거 터키에 머물러 정착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터키 정부는 승낙하였다.

 

   여기에 러시아는 체첸의 비옥한 평야지대에 대거 러시아인과 코사크인들에 대한 이주 작업을 지속적으로 실시하여, 점차로 체첸 북쪽의 영역에서 체첸인들보다 많은 수가 러시아인이거나 러시아에 동조적인 체첸인들로 들어차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각자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체첸인들은 점차로 코사크인이나 러시아인, 혹은 러시아와 친한 체첸인에게서 땅을 빌려서 농사짓거나, 혹은 타국으로 이주해야 했다. 상당히 많은 산민들이 후자를 선택하였다.

 

  이런저런 요인으로 인해, 1860년에서 65년까지의 기간 동안에 10만에 달하는 체첸인들이 터키로 떠났다. 이들은 중동 각지로 흩어졌으며, 오늘날에도 시리아, 레바논, 사우디, 특히 요르단에 많이 거주하는 해외 체첸인들의 시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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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에서 전통 춤을 추는 체첸인들

 

  러시아 정부가 위와 같은 휘유책과 대규모 이주 정책을 시행했을 무렵, 또 한 사람의 체첸인이 전란으로 지친 산민들의 새로운 우상으로 떠 올랐다. 그의 이름은 쿤타 하지 키시예프 였다.

 

  가지 무하마드가 막 항쟁을 부르짖던 1830년, 쿤타 하지는 체첸 산악지대인 멜카 히 에서 태어난다. 그는 자라면서 엄격한 도덕성과 성실성, 그리고 통찰력으로 이름이 알려진다. 후에 가족들이 일칸 유르트 지역으로 이주하였고,  그는 마을의 세이크로부터 이슬람 교리를 전수받았다. 그는 곧 상당한 이슬람 지식과 엄격한 수도 생활로 인해 산민들에게 존경받는 신학자가 된다.

 

  그가 20대가 됬을 무렵, 샤밀은 쿤타 하지를 메카로 순례를 보낸다.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정통 수피즘을 주창하는 쿤타 하지의 생각과 샤밀의 저항적 수피즘은 같이 설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쿤타 하지는 전쟁을 반대하고 비폭력을 통해 악에 맞설 것을 주장하였다.

 

  "전쟁 - 이건 야만에 불과합니다. 만약 적들이 여러분의 믿음과 명예를 박탈하려 오는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 스스로 전쟁에 대한 모든 욕구를 떨쳐버리십시요. 우리의 힘은 지혜, 인내, 공평입니다. 적들은 이 힘에 저항할 수 없으며 곧 그들의 패배를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이 추구하는 진리에의 길 - 타리카 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누구도 여러분을 패배시킬 수 없습니다."


  그 긴 항쟁의 기간 중에 체첸의 산민으로서는 정말 보기 드물게 평화를 추구하는 선각자였다. 그는 이런 말을 남긴 뒤에 순례를 떠났다.

 

  쿤타 하지는 메카로 순례를 가지 않았고 대신에 바그다드의 아불 카디르 길라니의 묘를 참배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수피즘의 또다른 주요 종파인 카디르의 교리를 받아들인다. 샤밀이 추구하던 낙슈반디 교단의 수피즘과 달리, 카디르 교단은 신과의 적극적인 합일을 추구하는 영적인 춤을 춘다. 일단의 사람들이 둥글게 둘러싼 뒤에 '라 일라하 일랄라'라는 구절을 몇 시간 동안이나 암송하는 것이다.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뜻이다. 이 영적인 춤을 '지크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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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크르 의식

 

  샤밀이 항복한 이후, 쿤타 하지는 이 카디르 교단의 가르침과 함께 체첸에 돌아왔다. 그의 설교는 수십년의 전쟁으로 황폐화된 체첸인들의 가슴속으로 파고든다.

 

   "여러분의 선량함과 사랑으로 악을

    여러분의 관대함으로 탐욕을

    여러분의 성실함으로 불신을

    여러분의 신실함으로 이교도를 이겨냅시다."


   쿤타 하지는 이와같은 설교와 함께 엄격한 종교적인 가르침을 전파하였다. 카디르 교단의 신도들은 하루 5번의 기도를 하는 것은 물론, '라 일라하 일랄라' 라는 구절을 하루에 적어도 백번은 암송해야 하며, 지크르에 참석해서 신과의 합일을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설교는 곧 폭발적인 호응을 얻는다. 그는 결코 스스로를 '이맘'이라고 지칭하지 않았지만, 그를 따르는 신도들의 수가 5천명에 달했다. 이런 상황으로 전개되자 러시아 군정부에서는 또다른 모반의 불씨가 되지 않을까 크게 우려하게 된다. 비록 그의 가르침이 전적으로 평화주의라는 것은, 러시아인의 눈에는 산민들 수천명이 한 사람의 지시 아래 움직인다는 것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었다. 또 다른 만수르, 또 다른 샤밀이 되지 않을까 우려하였다.

 

  결국 테레크 행정관 테르스코고 장군의 명령에 따라 1863년 1월, 쿤타 하지와 수십명의 추종자들이 체포된다. 러시아는 그를 강제 이주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쿤타 하지는 잡혀서 끌려가면서 그를 걱정해 몰려든 추종자들에게 마지막 설교를 하였다.

 

   "여러분, 우리는 조직적인 저항으로 인해 처참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차르의 힘은 이미 우리의 영역을 움켜쥐고 있습니다. 저는 터키의 술탄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군사를 보낼 거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그 역시 러시아의 차르나 다른 아랍 지배자처럼 착취자이기 때문입니다. 순례 중에 그를 직접 만나본 저를 믿으십시요. 앞으로의 저항은 결코 알라의 뜻이 아닙니다!

 

  만약 저들이 우리에게 교회를 가라고 하면, 가십시요. 단지 벽돌더미일 뿐입니다. 만약 저들이 십자가가 그려진 성복을 입으라 하면, 입으세요. 단지 헝겁조각일 뿐입니다. 그러나! 만약 저들이 우리 여자들을 겁탈하고, 우리의 언어, 문화 그리고 전통을 앗아가려고 한다면, 최후의 한 사람까지 저항하십시요! 민족의 자유와 긍지는 그들의 언어, 문화, 전통, 우애와 상호 용서, 고아와 과부들에 대한 배려, 그리고 마지막 빵 한조각이라도 나눌 수 있는 인정입니다."


  비록 쿤타 하지는 자신의 신도들에게 최후의 순간까지 평화를 전파하였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사랑하는 '이맘'을 그대로 보낼 수 없었다. 3천명에 달하는 산민들이 '킨잘' 이라는 그들의 단검 하나만 들고 그를 호송하는 러시아군에게 저항하였다. '단검의 반란' 혹은 '샬리의 항쟁'이라고 불리는 그 봉기는 164명의 산민들의 희생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 중에는 6명에서 8명의 여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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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당하는 쿤타 하지와 추종자들

 

  쿤타 하지의 그 뒤 운명은 오랬동안 산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1928년의 자료 조사에 의해 비로소 그의 운명이 알려졌다. 러시아는 쿤타 하지를 러시아 북부 노보고로드의 우슌자나 라는 곳으로 유형보냈다. 쿤타 하지는 5년 뒤인 1867년, 영양실조로 숨을 거뒀다. 오랬동안 전란에 지친 산민들에게 평화를 가르치려고 애썼던 어느 산민의 최후였다.

 

  쿤타 하지가 전파한 카디르 교단은 그의 죽음에도 체첸인들에게 널리 전파됬으며, 오늘날에는 체첸인의 60프로에서 70프로에 달하는 인구가 카디르 교단의 수피즘을 믿는다. 그를 지키기 위해 죽은 신도들의 무덤과, 그의 어머니의 무덤은 체첸인들에게 가장 신성한 장소로 남아있다. 비록 그의 꿈은 아직까지도 이뤄지지 않고 있지만...

 
  러시아 군정부는 산민들에게 반란의 불씨가 있기만 해도 어떤 수를 써서라도 꺼버렸다. 하지만 그 불씨는 어떤 계기만 있으면 너무나 쉽게 타올랐다. 쿤타 하지가 죽고 10년 뒤, 러시아가 다시 터키와 전쟁을 벌였을 대 그 불씨는 또 다시 타올랐다. 알리 벡 하지가 일으킨 반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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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 벡 하지

 

  반란은 1877년 4월, 러시아가 터키에 전쟁을 선포한 지 불과 며칠 뒤에 시작되었다. 주모자인 알리 벡 하지는 이슬람교를 공부하고 지역의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23살의 젊은이였다. 그는 과거 샤밀이 주창했던 것과 똑같이 러시아에 대한 완전한 자유를 얻고자 산민들에게 봉기를 호소하였다.

 

  하지만 이번 반란은 체첸과 다게스탄의 산악지대를 벗어나지 못한다. 러시아 제국의 식민화 정책은 나름의 효과를 얻었고, 체첸의 평야지대에는 이미 상당히 많은 러시아인과 코사크인들이 정착한 상태였다. 거기에 지난 수십년의 전쟁으로 인한 경험론으로 인해 산민들은 봉기에 가담하기를 꺼려하였다.

 

  그리하여 알리 벡 하지가 병력을 집결하고 처음 진격한 마을 샬리에서, 주민들은 그들을 마을에 들여보내지 않았다. 다른 저지대 마을에 가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알리 벡 하지는 이성을 잃고 그 일대를 약탈하였다.러시아군도 산간지대의 마을들을 똑같이 파괴하였고, 이성을 잃은 양쪽의 파괴에 의해 반란은 전에 없이 처참하고 잔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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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7년  러시아 - 투르크 전쟁

 

   결국 반란은 1년만에 진압되었고, 알리 벡 하지를 포함한 28명의 반란의 주모자들이 체포되었다. 군법 회의에서, 러시아 제국에 어떤 죄를 지었냐는 판사의 질문에 알리 벡 하지는 이렇게 말했다.

 

 

  "신과 체첸인에게 고백하건데, 우리가 지은 유일한 죄는 그 모든 희생에도 불구하고 신이 부여한 우리의 자유를 회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교수형이 선고되었다. 처형전의 마지막 소원을 물었을 때, 주모자 중의 한명인 70살의 우마 줌소에브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늙은 늑대에게 자기 자식이 죽는 것을 본다는 것은 힘든 일이지. 내 아들보다 나를 먼저 메달아 주게."   불행히도 러시아 형리는 이 마지막 부탁을 들어줄 만큼 자비롭지 않았다.


    러시아는 코카서스를 제압한 뒤, 그들을 단순히 힘으로 억압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러시아 제국은 체첸인들의 전통, 종교, 문화에 대해서는 최대한 간섭하지 않는 정책을 폈다.  동시에 체첸인들을 대거 이주시키고, 그 빈자리를 코사크인들로 채우고, 마을마다 러시아군을 주둔시키는 정책도 병행하여 고분고분하지 않은 산민들을 움켜쥐려고 하였다.

 

  특히 1877년의 반란은 이 지역이 안정됬다고 생각하던 러시아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러시아 제국은 1917년 혁명으로 무너질 때까지 이 지역을 군정으로 통치한다.

 

 

   하지만 산민들에게 평화란 너무나 일시적이고 덧없는 것이었다.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Imam_Shamil
              http://en.wikipedia.org/wiki/Kunta-haji
              http://www.krotov.info/history/20/tarabuk/chechn.html#777
              http://www.amina.com/article/br_hist.html
              http://www.chechnyafree.ru/en/article.php?IBLOCK_ID=352&SECTION_ID=697&ELEMENT_ID=68652
              http://www.chechnyafree.ru/en/article.php?IBLOCK_ID=352&SECTION_ID=697&ELEMENT_ID=68653
              http://www.truth-and-justice.info/chechnat.html

출처 : THIS IS TOTAL WAR
글쓴이 : jag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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