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하일 레르몬토프
샤밀은 자신의 신정국가 수도를 폐허가 된 다르고에서 체첸 남부의 베데노로 천도한다. 그리고 똑같이 러시아 제국에 대항하여 저항하고 있는 코카서스 산맥의 서쪽 체르케스인과의 연결을 꾀한다. 체르케스인들도 샤밀과 같은 동기로 수십년 전부터 러시아에 항쟁해 왔고, 그들도 이슬람교를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샤밀은 코카서스 산맥의 중앙의 카바르다인과 오세티아인을 봉기시켜서 체르케스인과 공동전선을 편성할 계획을 세웠다.
이듬해인 1846년, 샤밀은 1만 5천의 병력을 이끌고 카바르다 족의 영역으로 진군한다. 샤밀로서는 최초로 자신의 본거지인 체첸과 다게스탄을 넘어 다른 지역으로 원정을 간 것이었다. 그러나 이 대담한 시도는 위험성을 재빨리 감지한 러시아군의 신속한 반격과 카바르다인의 치명적인 지체, 그리스정교 오세티아인의 비협조, 그리고 불운에 의하여 실패한다. 1848년, 샤밀은 베데노로 퇴각한다.
카바르다 원정의 실패는 샤밀의 신정국가가 내리막으로 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은 러시아군을 대상으로 장거리 선제공격을 가할 능력이 없었다. 이는 러시아군의 공격에 방어 외에는 할 수 없음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체르케스인과 연계하여 러시아에 대항할 방법도 없음을 의미했다. 러시아군은 점차 자신감을 찾았다.
1848년, 코카서스 지역에 배치된 유능한 장군인 알렉산더 바랴틴스키 (Baryatinsky) 는 러시아군의 군사 원정으로 샤밀의 신정국가를 파괴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접근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꿨다. 산악지대에서 샤밀의 무리드들을 격퇴시키는 것은 러시아 최정예군이라도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산민들은 러시아 국내에서 가장 비옥한 땅 중의 하나인 코카서스 평야지대의 흑토에서 생산되는 식량이 필요했다. 또한 그들이 러시아군을 기습하기 위해서는 울창한 산림도 필요했다. 바랴틴스키는 이 두가지 요소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우선 체첸 평야 지대에 코사크인들을 대거 이주시켰다. 그들 역시 탁월한 승마술과 전사 기질을 갖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개척민이었던 코사크인들을 평야지대에 이주시키고 그들의 마을 주변에 요새를 구축하였다. 또한 러시아의 지배에 복종하는 산민들의 마을에 지속적인 식량 공급과 '안전'을 제공하였고, 기존의 러시아군이 자행했던 부녀자 학살을 일절 금지하도록 하였다.
여기에 샤밀의 신정국가의 핵심 요소인 이슬람교에 대한 작업으로, 러시아 정부는 1849년에 코카서스 지역에 8개의 이슬람 신학교를 건설하였다. 이를 통해 러시아측이 신앙의 자유를 존중할 뜻이 있음을 비추는 동시에 이슬람 신학에 정통하면서도 러시아 정부에 우호적인 신학자들을 양성하도록 하였다.
러시아측의 대처가 전과 달라지자, 오랜 전쟁으로 지칠 대로 지친 평야지대의 산민들은 점차 러시아군 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무엇보다도 샤밀에게 치명적이었던 것은 바랴틴스키가 가장 중점을 둔 '산림파괴'였다. 러시아는 샤밀의 신정국가를 토벌하기 위해 20만을 배치하였고, 그들은 나무를 하나하나 베어가면서 무리드들을 산악지대로 내몰았다. 자를 수 없는 두꺼운 나무는 폭파시켰다.
이 시기에 이르러 샤밀의 신정국가는 내부적인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원래 호전적이고 뭉치기 어려운 산민들을 하나의 깃발 아래 있게 한 것은 이슬람 종교의 힘과 잔인하기까지 한 샤밀의 철저한 내부 규율이었다. 샤밀은 상비군을 유지하기 위해 휘하의 산민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거뒀고, 이에 대해 저항하는 산민들을 가혹하게 처형하였다. 비록 러시아군도 똑같이 잔혹하게 하던 시절에는 외부의 압제자보다는 같은 산민의 지배하에 있는 것을 원했지만, 러시아가 식량과 안전을 제공하자 사정이 달라졌다. 점차 민심이 이반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갈수록 심각해졌고, 산민들의 핵심 군 사령관들 사이에서도 불화가 발생했다. 여기에 더해 샤밀은 자신의 아들, 가지 무하마드를 4대 이맘으로 세우려고 했으며, 이에 대해 반대하는 내부 세력을 숙청하였다. 샤밀 휘하 가장 뛰어난 군 사령관 중 한명인 하지 무라드가 샤밀의 진영에서 탈출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그는 러시아군에 협조하려고 했지만, 가족들이 샤밀에게 있었기 때문에 다시 러시아군을 탈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1852년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죽는다.
이러한 내부의 균열로 인해, 샤밀은 1853년에 발발한 크림전쟁을 자신의 전쟁에 유리하게 활용하지 못한다. 오랬동안 외부의 조력없이 싸운 샤밀에게 있어서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오스만 투르크와 대영제국, 프랑스가 격돌한 크림전쟁은 최대의 기회였다. 샤밀도 이를 직감하였기 때문에 러시아의 오랜 패권 경쟁국인 대영제국의 빅토리아 여왕에게 서한을 보낸다.
'매년 우리는 적군의 쏟아지는 병력에 대항하여 우리의 계곡에서 우리 자신을 지켜야만 하오. 우리는 겨울에 가족들을 숲속에 피신한 채 러시아군과 굳건히 싸웠지만, 우리 가족들은 아무런 식량도 피난처도 없이 그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야 하오. 여왕이여, 부디 우리를 원조해주시오.'
영국은 러시아의 위협을 충분히 감지하고, 또한 코카서스의 산민들의 저항에 동정하는 시각을 갖고 있었고, 심지어 러시아가 이곳을 장악하지 못하게 적극적인 원조가 필요하다는 시각도 있었지만, 이를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하였다. 크림전쟁으로 2만명의 병사가 죽은 영국으로서는 그 지역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를 꺼린 것이었다. 따라서 샤밀의 서한은 답장을 받지 못한다.
이는 이 지역의 전통적인 러시아의 경쟁국인 오스만 투르크도 마찬가지였다. 오스만 투르크는 자신과 직접 맞닿아 있는 서쪽 체르케스인과 연계하여 러시아 세력을 밀어내려 했고, 오마르 파샤가 지휘하는 터키군이 현재의 압하지아 지역을 통해 진군하였다. 그러나 혹독한 겨울로 인해 산민들과 합동 작전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1856년 크림전쟁이 종전된 후로 투르크는 이 지역에서 군 작전을 수행할 열의와 능력을 잃었다.
비록 샤밀이 터키군의 진군과 연계하기 위해 1853년 가을에 남쪽 그루지아의 트빌리시 지역을 원정하였지만, 카바르다 원정이 실패한 것과 비슷한 요인으로 인해 실패하였다.
- 이 원정에서 샤밀은 그루지아 공주인 안네 챠브챠바제 (Annette Chavchavadze)를 포로로 잡는다. 샤밀은 그루지아 공주를 15년 전에 러시아군에게 넘겨줬던 자신의 아들 제말 에딘과 교환하게 하였다. 러시아가 자신의 아들을 넘겨주자, 샤밀은 아들을 끌어안고 흐느꼈다고 한다. 불행히도 러시아 황제의 밑에서 자란 샤밀의 아들은 자신의 고향에 적응하지 못하고 몇 달 뒤에 죽게 된다. -
결국 샤밀은 영국과 터키 어느 쪽으로도 원조를 받지 못하였다. 샤밀의 신정국가의 저항능력은 점차 소진되고 있었고, 외부의 조력도 기대할 수 없었다. 거기에 러시아 제국은 어려운 크림전쟁의 와중에도 무려 20만이 넘는 병력을 샤밀을 토벌하기 위해 배치하는 놀라운 열의를 보였다. 점차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최후의 결정타는 1858년 현 잉구세티아의 나즈란 전투였다. 러시아군의 요새 건설로 주변 지역으로 내몰린 잉구세티아 산민들이 러시아군에 대항하여 봉기하였고, 샤밀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샤밀은 즉각 무리드들을 이끌고 나즈란으로 향했지만, 대포를 앞세운 러시아군의 공격을 정면으로 격퇴시킬 수는 없었다. 결국 산으로 후퇴해야 했으며, 요새를 에워 쌓던 반란은 진압되었다. 러시아에 대항한 산민들을 보호하는 데 실패하자, 이제 산악지대의 산민들도 샤밀의 휘하에 있을 이유를 잃어버렸다. 샤밀의 영역은 급속히 러시아에게 흡수되었고, 어느새 최전성기의 4분의 1에 불과한 영역만이 신정국가의 깃발을 들고 있었다.
1859년 4월, 러시아군 사령관 바랴틴스키는 샤밀의 신정국가 수도인 베데노를 향해 진격하였다. 이미 거의 모든 무리드들과 산민들이 러시아에게 돌아선 샤밀은 그 공세를 막아낼 힘이 없었다. 그는 다게스탄으로 탈출하였고, 러시아군이 가장 공격하기 힘든 마을인 구니브로 이동하였다. 최후까지 그와 함께한 400명의 무리드들과 샤밀은 그 곳에서 투쟁의 끝을 장식하고자 하였다.
그 해 8월, 바랴틴스키는 3만의 러시아군을 이끌고 산민들의 최후 요새인 구니브를 포위하였다. 지금까지 수차레 이런 상황에서의 공격이 얼마나 어려운지, 산민들의 저항이 얼마나 처절한지, 그리고 러시아군의 손실이 얼마나 막대한 지 잘 알고 있었던 러시아군 사령관 바랴틴스키는 샤밀에게 제안을 하였다. 항복하거나, 아니면 가족들 전부 몰살되느냐. 1859년 8월 25일, 샤밀은 400명의 무리드들과 함께 항복하였다.
- 샤밀의 항복에 대하여, 그에게 포로로 잡혔던 그루지아 공주 챠브챠바제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자들은 샤밀이 최후까지 싸우다 죽어야 했다고 하지만, 나는 그가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두목인 자신은 러시아군에 의해 목이 베이거나 메달릴 거라고 믿었지만, 다른 사람들과 같이 죽는 것이 아니라 혼자 죽는 길을 선택하였다. 최후의 순간에 샤밀은 사람들이 전쟁에 지쳤으며, 이제 삶을 원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
러시아군은 자신들이 그토록 잡고 싶었던 산민들의 두목을 매우 정중하게 다루었다. 샤밀은 자신의 운명이 교수대에서 끝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그의 투쟁에 대해 깊은 경외심을 갖고 있었던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 2세는 칼루가 시에 샤밀과 그의 가족들을 가택 연금을 시키고 정중하게 대하였다. 심지어 2만 루블의 연금도 제공하였다고 한다.
샤밀은 그 뒤 러시아 황제의 허가를 얻어서 1871년, 메카에 순례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살아있는 무슬림의 영웅으로 수천의 참배객으로부터 환호성을 듣는다. 그 뒤에 메디나로 여행을 떠나고, 샤밀은 그곳에서 죽는다.
이리하여 샤밀의 25년에 걸친 항쟁은 막을 내렸다. 3대 이맘으로 추대된 1834년부터, 구니브에서 항복하는 1859년까지, 샤밀의 대러시아 항쟁은 코카서스 산민들에게 전설로 남았으며, 서구 유럽과 저 멀리 미국에까지 그의 이름은 전설처럼 퍼져나갔다. 그리하여 '다게스탄의 사자'라는 이름과 함께, 샤밀은 19세기 서구 열강의 침략에 저항한 소수민족의 투쟁의 대명사가 되었다.
러시아는 결국 샤밀을 패배시켰지만, 이는 샤밀에게 '승리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서방의 대제국을 이겨내기에는 그의 코카서스 신정국가의 국력이 너무나 원시적이었고 약했던 것이다. 또한 내부를 하나의 기치 아래 규합시킨다는 것이 산민들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문제였다. 비록 샤밀이 이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지만, 완전히 극복해내지 못했다.
그러나 산민들의 투쟁이 제정러시아에게 입힌 피해는 상당하였다. 샤밀의 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840년부터 1859년까지의 기간 동안, 러시아는 1년 국고의 6분의 1을 코카서스 지역에 쏟아부어야 했다. 또한 코카서스 지역에 30만의 러시아군을 배치해야 했고, 이 중 20만의 병력이 샤밀의 신정국가와 대치해야 했다. 7만 7천의 러시아군이 코카서스 전쟁으로 전사하였다. 이런 엄청난 경험으로 인하여 러시아 제국은 향후 코카서스 지역을 통치할 때는 매우 신중을 기해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Imam_Shamil
http://en.wikipedia.org/wiki/Caucasian_War
http://en.wikipedia.org/wiki/Imam_Shamil
http://en.wikipedia.org/wiki/Russian-Circassian_War
http://en.wikipedia.org/wiki/Viceroyalty_of_the_Caucasus
http://www.amina.com/article/br_hist.html
http://www.amina.com/article/jihad_imamshamyl.html
http://www.truth-and-justice.info/chechnat.html
Sebastian Smith의 'Allah's mountau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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