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과 사를 막론하고 그의 말은 곧 법이었으며, 그의 깃발 아래 산민들은 모두 러시아에 대항해 죽음으로써 싸울 것을 맹세하였다.
- Lesley Blanch의 The sabres of Paradise 중에서
3대 이맘 샤밀. 그는 그때까지 존재했던 모든 성전과 투쟁의 이론을 집대성하고 실현시킨 인물이었다. 그의 이름은 코카서스를 넘어 유럽과 미국에까지 퍼졌으며, 심지어 그가 대적해서 싸운 러시아에게도 경외심을 불러일으켰고, 그의 전설은 아직까지도 코카서스 일대에서 회자되고 있다.
전설은 1대 이맘인 가지 무하마드가 피살된 1832년 김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러시아는 산민들의 두목인 무하마드를 죽이기 위해 수십개 마을을 불태운 뒤에 김리를 에워쌓았다. 그곳에서 이맘은 전사하고, 그의 주위의 60명의 무리드들도 하나하나 죽어갔다. 러시아군은 한명한명씩 처치하면서 김리를 불태우고 있었고, 어느덧 날이 어두워져다.
"...바로 그 때, 우리가 포위했던 탑에서 한 남자가 걸어나오는 것을 목격했다. 매우 키가 크고 강단있게 생긴 자였다. 마치 우리에게 무기를 잡을 시간을 주는 듯이, 그는 잠시 우리를 둘러보았다. 갑자기 그는 우리를 향해 놀라운 속도로 달려오더니, 겹겹이 에워쌓던 우리 부대의 앞열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를 향해 사격하던 병사들이 깜짝 놀라는 사이에, 왼손에 검을 쥔 채 마주치는 병사들을 베어나갔다.
자신의 탈출을 막으려는 우리측 병사 3명을 벴지만, 4번째 병사가 그 자의 가슴팍을 총검으로 쑤셔버렸다. 하지만 그는 표정하나 바꾸지 않은 채 총검을 자기 가슴에서 뽑아버렸다. 그걸로 그 병사를 베어버린 뒤에 다시 도약을 해서 뒤에 있던 병사들을 넘어버렸다. 그런 뒤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당시 전투에 참전했던 러시아군 장교의 회고다. 그 산민이 바로 샤밀이었다.
김리 전투
감자트가 피살된 1834년, 샤밀은 다게스탄에서 3대 이맘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전임자가 산민들의 피의 복수에 피살되었던 것처럼, 그들은 이맘이라고 해서 순순히 휘하에 집결하지 않았다. 특히 누군가의 밑에 있는 것에 결코 익숙치 않았던 체첸인들은 이맘에게라도 그리 고분고분한 자들은 아니었다. 이는 이맘으로 선출될 당시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타수 하지라는 체첸인이며, 그의 협조를 얻고난 뒤에야 비로소 체첸인들이 샤밀의 항쟁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샤밀은 러시아와 싸우기 전에 먼저 산민들을 하나의 깃발아래 집결시키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북쪽의 붉은 선은 19세기 초의 러시아 영역. 파란 색은 서쪽 체르케스인, 자주색은 카바르다인, 노란색은 오세티아인, 녹색은 체첸과 다게스타인의 영역
그리하여 샤밀은 1837년까지 전임자들이 추구했던 '토착법을 이슬람 율법으로 정착'시키는 일에 몰두하면서, 체첸과 다게스탄의 여러 부족들을 하나하나 집결시켰다. 러시아 황제는 또다시 모반의 기운이 이는 것을 느끼고, 샤밀에게 직접 대면하여 협상할 용의를 보였다. 샤밀은 이슬람 율법을 보장해주는 조건으로 러시아군이 철수하고, 자신을 산민들의 지배자로 인정하면 자신도 러시아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겠다는 협상안을 보냈다. 그러나 협상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러시아 황제는 그루지아에서 몇몇 산민을 만났을 뿐이었다.
러시아는 샤밀과 협상할 수 없다면, 더 위험해지기 전에 토벌해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1839년, 글라세 백작이 지휘하는 러시아군은 3대 이맘을 죽이기 위해 중부 다게스탄으로 향했다. 또다시 마을 하나하나가 함락되었다. 러시아군이 처음 함락시킨 아실타라는 마을에서는, 2천의 무리드들이 러시아군에게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을 코란에 맹세하였다. 러시아군은 한명의 포로도 잡지 못하고 모두 죽였다고 한다. 이런 전투를 수도없이 겪은 뒤에 러시아군은 그 해 6월 29일, 샤밀의 본거지인 아훌고를 포위하는 데 성공한다.
샤밀은 이곳에서 러시아군의 막대한 병력과 근대식 병기를 상대로 무려 80일을 버텨낸다. 아훌고는 3면이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지고, 가운데 협곡으로 둘로 갈라진 마을이었다. 협곡 사이는 20미터의 나무 다리가 연결되어 있었다. 여기에 러시아군을 피해 산으로 도피했던 수많은 부녀자들과 아이들, 그리고 샤밀에게 충성하는 '나이브 (보좌)'들과 수천명의 무리드들이 있었다.
러시아군의 첫 공격은 험한 절벽을 기어 올라가다가 산민들이 떨어뜨린 돌과 불타는 통나무에 맞고 350명이 전사하였다. 러시아군은 4일 동안 후퇴한 뒤에 대포를 끌고와서 마을의 목책들을 겨냥했다. 하지만 목책이 가루가 되어도 절벽을 넘어서 산민들을 공격한다는 것은 막대한 피해만 입은 채 번번히 실패하였다. 글라세 백작은 작전을 바뀌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3개 절벽을 연달아 공격해서 요새의 산민들을 분산시키는 것이었다.
첫번째 러시아군의 공격은 체첸 저격수들의 사격으로 삽시간에 장교들이 모두 전사하게 되자, 600명의 전사자를 내고 실패하였다. 두번째 러시아군의 공격은 체첸인들이 암석을 굴리면서 격퇴시켰다. 마지막으로 러시아군이 세번째 절벽을 향해 공격하였다. 앞서 두차례의 공격에 대응하느라 모든 체첸인 무리드들이 동원되었지만, 남아있는 여자와 아이들이 손에 검을 쥐고 러시아군을 향해 뛰어들고 사력을 다해 싸워서 격퇴시켰다. 산민들 중에 종종 여자들이 싸우는 경우가 있는 데, 워낙 필사적으로 싸우기 때문에 러시아군은 포로로 잡을 엄두도 못낸다고 한다. 결국 백작이 주도면밀하게 짠 3방면의 러시아군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아훌고 전투
이 전투 뒤에, 글라세 백작은 샤밀에게 협상을 요청한다. 샤밀의 아들을 인질로 넘겨주면 러시아군은 물러나겠다는 것이다. 러시아군의 오랜 포위로 마을 안의 상황은 처참하였고, 샤밀은 찢어지는 마음으로 자신의 8살된 아들을 러시아군에게 넘겨준다. 하지만 아들이 러시아 수도 샹트 페테르스부르그로 이송되는 순간, 러시아군은 포격을 가했다. 샤밀은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랜 포격전 끝에 러시아군은 마침내 아훌고를 함락시켰다. 밤새 이동 가능했던 사람들은 모두 탈출하고 마을에는 부상자와 노약자 뿐이었지만, 러시아군은 산민들의 본거지를 함락시킨 것을 크게 기뻐하였다. 러시아 코카서스 주둔군 사령관 예브게니 골로빈 백작은 아훌고의 함락을 수도에 보고하며, 산민들의 둥지는 파괴되고 러시아에 대항하는 자와 그 추종자들 모두는 말살되었다고 전했다. 러시아 황제는 크게 기뻐하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것은 너무나 성급한 생각이었다. 샤밀이 아직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샤밀은 아훌고를 빠져나와 체첸의 남부 산악지대로 향했다. 그곳에서 현지 체첸인들을 규합하고 다게스탄의 부족들과 함께 러시아에 대항하는 '신정국가'를 창설한다. 신정국가는 그 동안 이론만이 주창되고 실제 구현되지 못했던 성전의 요소들, 즉 산민들을 규합시킬 이슬람 율법의 제정과 모든 피의 복수의 금지, 율법의 법정에 근거한 사법 통치를 하기 위해서였다.
샤밀은 다게스탄과 체첸의 60만 산민들을 자신의 깃발 아래 규합시키고, 이슬람 율법 샤리아를 현실에 맞게 변형한 '샤밀의 법전' - 니잠을 창안한다. 이는 당시로서는, 특히 유럽에 비해 낙후되었던 코카서스 산악지대로서는 놀랄만큼 혁신적인 법안이었는 데, 예컨데 도둑에 대하여 이슬람 율법은 '오른손을 절단하라'고 되어있지만 니잠에 따르면 3개월의 구금에 처하게 되어있었다. 또한 관습에 따르면 '피의 복수'를 통해 해결할 문제를, 니잠에서는 구금과 벌금형으로 처리하도록 하였다.
이 '니잠'에서는 군사, 행정 분야의 규정도 제정되었다. 우선 신정국가는 수십개의 '나이브스트보 (지구)'로 분류하였고, 이 지구에 이맘 샤밀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나이브 (보좌)'와 이슬람 율법을 재판하고 판단하는 '카지 (성직자)'를 두었다. 행정상의 최고 책임과 지역의 군사 문제는 '나이브'가 책임지고, 종교적인 판단이 필요한 문제나 지역의 이슬람 포교와 행사는 '카지'가 담당하였다. 이 양자의 충돌이 있을 경우에는 샤밀이 직접 개입하여 해결하였다. 이외에도 일반 민법과 형법 규정까지 두고 있었다.
샤밀의 나이브
또한 샤밀은 국민개병제를 실시하여, 모든 신정국가의 15세에서 50세 사이의 남자들은 병역의 의무가 있었다. 유사시에는 모든 의무자들이 동원되고, 평시에는 열 집 중에 한 집에서 한명의 장정이 복무하면, 나머지 9집에서 그 장정의 복무 비용을 부담하는 형태였다. 이런 제도를 통해 샤밀은 거칠고 제멋대로인 산민들을 잘 훈련되고 조직된 군인으로 만들 수 있었고, 그의 깃발 아래 1만에서 1만 5천의 병력을 항시 보유할 수 있었다.
러시아가 아훌고의 함락으로 크게 기뻐하며 잠시 코카서스 지방에서 관심을 돌린 사이에, 샤밀은 이와같은 군사 행정 체제를 완비하였다. 러시아가 이 사실을 깨달은 것은, 잘 정비되고 조직된 샤밀의 군대가 1840년 말에 아훌고를 다시 함락시킨 뒤의 일이었다. 때마침 코카서스 산맥 서쪽, 흑해 연안의 체르케스인의 반란에 직면한 러시아는 사태가 매우 심각해졌음을 깨달았다.
이제 코카서스의 산민 토벌전은 국가대 국가의 혈전으로 바뀌었으며, 러시아는 나폴레옹 전쟁 이래 최대의 전쟁을 하게 되었다.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Imam_Shamil
http://en.wikipedia.org/wiki/Caucasian_War
http://en.wikipedia.org/wiki/Viceroyalty_of_the_Caucasus
http://www.amina.com/article/br_hist.html
http://www.amina.com/article/jihad_imamshamyl.html
http://www.chechnyafree.ru/en/article.php?IBLOCK_ID=352&SECTION_ID=0&ELEMENT_ID=42384
http://www.chechnyafree.ru/en/article.php?IBLOCK_ID=352&SECTION_ID=697&ELEMENT_ID=67729
http://www.truth-and-justice.info/chechnat.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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