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읽 기/불굴의 용기

[스크랩] 코카서스의 늑대들 : 체첸 - 7. 이맘들의 나라

공만타 2009. 11. 25.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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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무하마드의 고향, 다게스탄 김리

 

 


  가지 무하마드. 그는 첫번째 이맘(Imam)이다. 이맘이란 '종주(宗主)'로 번역될 수 있는 말로 정치, 행정, 종교 특히 군사에 있어서 최고 권한을 갖고 있는 신정국가의 수장이었다.

 

  당시 북카프카즈에 전래된 이슬람교는 수니파에서 파생된 수피즘이었다. 수피즘은 두가지 이질적인 요소가 있었다. 하나는 개인의 구도를 통한 신에의 합일 (타리카)을 추구한다는 신비주의적인 요소와, 이슬람 공동체에 대한 평등 의식과, 사회 지배 권력의 핍박에 대한 저항적인 요소였다.

 

  1820년대에 수피즘을 전파했던 시대에는 이 두가지 요소에 대한 대립이 존재하였다. 전자를 타리카 뮤리디즘, 후자를 나이브 뮤리디즘이라고 불렀다. 무리디즘이라는 뜻은 수피즘 특유의 스승 (무르시드)과 제자(무리드)의 절대복종 관계를 의미한다. 북카프카즈의 뮤리디즘은 절대권력자 이맘을 스승으로, 그 휘하 종교적인 신념으로 단련된 무장들을 제자로 한 군사적 이데올로기였다.


   처음 수피즘이 전파된 시대에는 개인의 구도를 중시하는 타리카 무리디즘의 요소가 강했다. 본래 수피즘의 구도가 궁극에 달하면 신과의 합일 이외의 일체의 관심사는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대 가장 권위있는 종교지도자인 마고메드 야라스키는 러시아의 혹독한 탄압 아래의 구도는 무의미하다고 선언하였다. 특히 예르몰로프의 가혹한 통치는 초기에 구도를 추구하던 마고메드에게 성전을 추구하도록 만들었다. "무슬림들은 이교도의 통치 아래 있어서는 안되며, 강력한 국가에 예속된 노예가 되서도 안된다."  그의 피를 토하는 듯한 열변은 수피즘의 또다른 얼굴인 사회 저항적인 요소가 북카프카즈에 정착이 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이러한 시대 흐름 속에서 다게스탄에서 수피즘을 배운 가지 무하마드가 자신의 고향 김리에서 열변을 토하였다. 러시아의 혹독한 탄압과 가혹한 수탈을 무찌르기 위해서는, 우선 코카서스인들의 대동단결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 씨족과 부족별로 제각각인 관습법을 포기하고,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를 받아들여야 하며, 씨족 사이의 피의 복수 (Kanli)는 이 샤리아 법정에서 공정하게 해결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부족들이 자신들의 이기심을 극복하고 대승적 차원에서 결합할 때에만 신이 그들에게 러시아를 무찌르는 승리를 내려줄 거라는 것이다. 과거 세이크 만수르가 제시했던 길을 따라, 그는 성전의 길을 제시하였다.

 

  가지 무하마드의 열변은 엄청난 호응을 얻었고, 그는 더 나아가 이렇게 말했다.

 

 "이슬람인들은 결코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서는 안되며, 그들에게 종속된 한 어떠한 기도, 금식, 헌금, 순례도 의미가 없다."


   김리의 모스크에서 이슬람 학자들에 의해 코카서스의 첫번째 이맘으로 추대된 가지 무하마드는 이제 성전의 때가 도래했다고 선언하였다. 때는 1829년, 코카서스에서 최초의 신정국가 수장이 탄생하였다.

 

   다게스탄에서 시작된 성전은 곧 코카서스의 각지에서 호응을 얻었다. 당시 러시아는 오스만 투르크와 페르시아를 완전히 몰아낸 상태로, 이제 외부의 위험 요소는 사라진 상태였다. 그리하여 샹트 페테르스부르크의 전략자들의 눈에는 그곳은 이제 확고히 다져진 러시아의 영역이 된 상태였다. 그러나 서쪽의 체르케스인과 동쪽의 체첸, 잉구쉬, 다게스탄의 부족들의 생각은 달랐다.

 

  가지 무하마드는 체첸인들에게 세이크 아바달라 아슐티를 보내 자신의 깃발 아래 모이게 하였다. 산민들 중에서 체첸인들이 가지 무하마드의 성전에 가장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1830년, 가지 무하마드는 자신의 휘하에 1만 2천명의 열성적인 산민들을 집결시킬 수 있었다. 그의 휘하 부하 중에 가장 핵심은 고향 친구인 샤밀과 다게스탄 훈자흐 출신의 감자트였다. 가지 무하마드는 이 병력으로 체첸과 다게스탄의 러시아 거점들을 함락시킬 계획을 세웠다. 특히 키즐레이, 그로즈니, 브네자프나야가 핵심 거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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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코카서스군 사령관 이반 파스케비치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예르몰로프의 후임이자 러시아 코카서스군 사령관 파스케비치는 산민들에게 포고를 내렸다. 가지 무하마드는 '시국 혼란자'이며, 그에게 체첸과 다게스탄 산민들은 협력하지 말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파스케비치는 오스만 투르크를 격파하여 최종적으로 코카서스에 대한 러시아의 우위를 확보하게 되는 전쟁의 사령관이었고, 당시 차르 니콜라이 1세에게 다음과 같은 전갈을 받는다.

 

  코카서스의 산민들을 굴복시켜라  

  굴복시킬 수 없다면 말살시켜라

 

  이는 당시 산민들에 대한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1세의 입장이자, 향후 수백년 동안 본질적인 면에서 결코 변함이 없는 러시아의 대 코카서스 정책을 함축한 표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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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1세 (재위 1825 ~ 1855)


   가지 무하마드의 첫번째 공격은 1831년, 다게스탄의 남쪽 고개인 데르벤트를 노린 것이었다. 험준한 산악 요새에 대한 첫번째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가지 무하마드는 신속하게 병력을 움직여서 테레크 강의 저지대의 중요한 거점이자, 세이크 만수르가 공격하다 실패했던 요새 키즐레이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한다. 거기에 다게스탄의 가장 중요한 거점인 타르쿠와, 현 잉구세티아 수도인 나즈란 요새도 함락시켰다. 러시아의 코카서스 산맥 동쪽의 방어망에 큰 구멍이 뚤렸다. 러시아는 파스케비치 사령관을 교체하고 그리고리 로젠 남작을 코카서스의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1832년, 가지 무하마드는 요새 주변의 러시아군에게 포섭된 마을들에 대한 공격과 함께, 나머지 러시아 요새인 그로즈니, 블라디카프카즈 (현 북 오세티아의 수도), 브네즈파나야 (현 체첸의 동쪽)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브네즈파나야에 대한 공격은 요새 함락에는 실패했지만,  그 요새에 주둔했던 로젠 남작에게 증원군을 요청하게 하기에는 충분하였다. 그리하여 500명 이상의 코사크 분대가 급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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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하마드의 무리드들은 코사크 병력을 산악지대로 유인했다가 매복 공격을 가하였다. 이 공격은 크게 성공을 거둬서 코사크 분대는 3분의 1의 사상자를 내고 와해되었다. 하지만 이미 함락시킨 요새 주변의 산민들의 비협조와, 로젠 남작의 추가 병력이 집결하여 산민들을 압박하자 가지 무하마드는 다게스탄으로 후퇴하여야 했다.

 


  로젠 남작은 2만의 러시아군으로 체첸과 다게스탄의 산악지대를 쑥밭으로 만들면서 가지 무하마드를 추격하였다. 러시아군은 마을 하나하나를 함락시키면서 그의 고향 김리를 향했는 데, 각 마을들은 결코 쉽게 손을 들지 않았다. 추오므케스켄트 마을에서, 러시아군은 155명의 무리드들을 죽이는 데 4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심지어 츠소리(Tsori)라는 지역에서는, 러시아군이 산악 고개를 돌파하는 데, 단 2명의 체첸인 저격수에게 러시아군 4천명이 3일 동안 발이 묶여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군의 압도적인 병력은 산민들의 저항을 뚫고 마침내 1832년 10월, 가지 무하마드를 그의 고향 김리에서 포위할 수 있었다. 그곳까지 가는 동안 러시아군은 61개의 마을을 파괴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산민들을 죽였다. 가지 무하마드는 김리에 60명의 무리드들과 같이 있었고, 그들은 2개의 요새 속에서 농성하였다.

 

   러시아군은 무리드들의 질긴 저항을 뚫고 마침내 가지 무하마드를 죽이는 데 성공한다. 초대 이맘이었던 그는 카펫에 앉아서 한 손으로 수염을 쓰다듬고 한 손으로는 하늘을 가르키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그런 상태로 러시아군이 자기를 죽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리드들도 러시아군의 공격에 하나하나 죽어갔고, 60명 중에 단 2명이 살아서 탈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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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리 전투. 이곳에서 가지 무하마드는 전사한다.


 가지 무하마드의 뒤를 이은 2대 이맘은 그의 한팔이었던 감자트 벡 (Hamzat bek)이었다. 그는 우선 내부 조직을 정비하고, 그 다음에 외부의 러시아를 상대해야 한다고 봤다. 그래서 1833년, 감자트는 러시아에게 만약 산민들에게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를 준수하도록 한다면 러시아와 협상할 용의가 있다고 하였다. 물론 러시아가 이를 거절할 것을 알고, 잠시 시간을 끌기 위한 책략이었다. 러시아는 이에 응답도 하지 않았다.

 

  감자트는 자신의 신정국가가 정착이 되기 위해서는 코카서스 산민들의 유력자, 특히 다게스탄의 여러 한 (몽고의 칸에서 유래된 표현으로, 여러 다게스탄의 부족의 족장급들을 의미한다.) 들의 권한을 박탈하고 자신의 깃발 아래 집결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1833년에 다게스탄 아바르 족의 영역을 공격하여 4명의 한을 죽였다.

 

  하지만 이 조치는 다게스탄의 몇몇 유력 가문의 '피의 복수'를 불렀고, 결국 감자트는 이듬해인 1834년 9월, 금요 예배를 위해 들어선 모스크에서 암살되고 만다. 당시 감자트를 암살한 자가 바로 '하지 무라드'였다. 그는 아바르족의 한들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피를 갚아준 것이다. 그리하여 2대 이맘은 코카서스 산민들의 피의 복수로 인해 죽었다.


  러시아는 1대 이맘인 가지 무하마드가 5년의 긴 전쟁 끝에 전사하고, 이어서 2대 이맘도 어이없이 죽자, 코카서스 산민들의 저항도 그리 오래 끌지 않으리라 기대하였다. 투쟁의 구심점이 연달아 사망하였고, 내부 분열 조짐도 상당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특히 서로 살벌한 피의 복수가 오고가던 산민들이 대동단결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3대 이맘이 선출되었다. 그는 세이크 샤밀 (Shaykh Shamil)로, 가지 무하마드의 고향 친구이자 김리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2명의 무리드 중의 한명이었다. 그는 이제 코카서스 상황이 정리되었다고 생각한 러시아 제국에게, 싸움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였다. 또한 유럽인들에게 약소민족이 대 제국을 상대로 어디까지 싸울 수 있는 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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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Ghazi_Mollah
            http://en.wikipedia.org/wiki/Gamzat-bek
            http://en.wikipedia.org/wiki/Caucasian_War
            http://www.amina.com/article/br_hist.html
            http://www.chechnyafree.ru/en/article.php?IBLOCK_ID=352&SECTION_ID=0&ELEMENT_ID=42384
            http://www.truth-and-justice.info/chechnat.html
            http://varvar.ru/arhiv/gallery/battle_art/rubo/

출처 : Europa Universalis
글쓴이 : jag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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