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읽 기/불굴의 용기

[스크랩] 코카서스의 늑대들 : 체첸 - 16. 외전 = 바위같은 사나이

공만타 2009. 11. 26. 21:25

 

 

 

 

바이산그로프 베노이스키

 

   1794년 베노이에서 태어난 바이산그로프의 1830년 이전의 행적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가지 무하마드가 성전을 선언하자, 바이산그로프는 이에 가담하였다. 그의 본거지인 베노이는 곧 무하마드의 주요 거점이 되었다. 당시 역사가인 치차고바의 기록에 의하면, '숲에 둘러쌓인 베노이 마을의 주민들은 러시아에 대한 적의를 숨기지 않았고, 항상 반항할 기회 만을 노렸다. 그들은 기꺼이 샤밀의 모반에 가담하였다.'

 

 1832년 봄,  바이산그로프의 지휘하의 산민들은 구데르메스에서 코사크 연대를 격파하였고, 2문의 대포를 노획하였다. 이 전투로 베노이 지역은 바이산그로프의 부대가 장악하였다.   1839년, 바이산그로프는 3대 이맘 샤밀에게 충성 서약을 하였다. 샤밀은 바이산그로프를 베노이 지역 나이브로 임명하였다.

 

  1842년, 첸토로에브스코가 지휘하는 이치케리스코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 해 5월에서 6월 사이에 벌어진 이 전투는 베데노 지역의 숲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당시 러시아군 사령관 그라베 장군은  샤밀의 신정국가 수도 다르고를 향해 진군하였다. 총병력은 9천으로, 12개 보병 연대와 300명의 코사크 기병, 24문의 대포가 동원한 대규모 공세였다. 이에 맞선 산민들의 병력은 소프 물라가 지휘하는 2천명의 병력 뿐이었다. 바이산그로프는 베노이의 산민 요새의 방어를 맡았다.

 

 

 

 

 

이치케리스코 전투

 

 

 

   전투는 5월 30일에서 6월 2일까지 진행되었다. 러시아군은 요새 앞에서 발이 묶인 채 사방의 숲에서 공격하는 소프 물라의 공격에 의해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산민들은 기존 전투에서 노획한 대포들에 스스로 제작한 포탄을 사용하면서 러시아군을 포격하였다. 마침내 그라베가 후퇴명령을 하고 철수할 때까지, 러시아군은 66명의 장교와 1710명의 병사를 잃고 수천명이 부상당했으며, 6문의 대포까지 노획되었다.  산민들의 사상자는 600명이었다.

 

  이 전투의 공으로 바이산그로프는 샤밀로부터 그의 용맹을 기리는 훈장을 받는다. 또한 군 사령관 그라베는 기존의 알렉산더 2세로부터 얻은 총애를 모두 상실한 채 카스피해 연안으로 좌천되고 만다.

 

  1845년, 바이산그로프는 러시아군의 최대 재앙인 다르고 전투에 참전하였다. 이 전투에서 보론초프 백작의 러시아군은 1만 1천의 병력 중에 사상자가 4천명이 넘었다. 바이산그로프는 이 전투로 한쪽 팔을 잃는다.  샤밀은 그의 용맹을 치하하며 이렇게 불렀다. "타스 아담  (바위같은 사나이)"

 

 

 

 

 

 

산민들이 노획한 러시아군 대포

 

  1847년, 러시아군은 다게스탄의 게르게빌 마을을 포위한다.  바이산그로프는 한쪽 눈과 한쪽 팔을 잃은 채 이 지역을 방어하였다. 한번은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한쪽 발을 잃은 채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날이 밝자 러시아군은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한 채 포로로 끌고 갔다. 샤밀은 바이산그로프가 포로가 된 것은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그를 탈출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손을 썼다.

 

  다게스탄의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많은 산민을 포로로 잡았고, 바이산그로프를 포함한 포로들을 체첸 그로즈니로 이송하였다. 샤밀의 명령에 따라, 솔타 무라드가 지휘하는 일단의 산민들은 이 행렬을 기습하여 대부분의 포로를 석방시키고 바이산그로프를 구출하였다.

 

   바이산그로프는 아직 다리의 부상이 완치되지 않은 채,  살티 지역의 방어전에 참가하였다. 이 전투 이후로, 한쪽 눈과 한쪽 팔, 한쪽 다리를 가진 바이산그로프는 말에 자신의 몸을 묶은 채 전장을 누볐다.

 

  1857년부터 1859년까지, 러시아군은 20만이 넘는 대군으로 체첸과 다게스탄의 산민들을 섬멸하였다. 1859년이 되자, 체첸과 다게스탄의 거의 모든 지역이 러시아군에게 굴복하였다. 샤밀의 휘하 나이브들도 차례차례 러시아군에게 굴복하였다. 체첸의 인구는 25년 전보다 무려 5분의 1로 줄어 있었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샤밀의 휘하에서 싸웠다. 

 

 

 

 

 

 

 

   바이산그로프는 마지막 순간까지 베노이 지역을 사수하다가, 샤밀이 구니브로 향했다는 말을 듣고서야 철수하였다. 베노이는 페허가 되었다. 마지막 순간의 샤밀은 400명의 부하들과 3문의 대포를 갖고 있었다. 이에 맞선 러시아군은 3만을 헤아렸다.


  전설에 따르면, 샤밀은 러시아군에게 항복할 결심을 굳혔다. 바이산그로프는 그에 강하게 반대하며, 절대 항복하지 말고 끝까지 항전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포위망을 탈출하여 다시 체첸에서 봉기하자고. 하지만 샤밀은 이를 물리치고 끝내 러시아군을 향해 걸어나갔다. 바이산그로프는 자신의 권총을 겨누면서 샤밀을 불렀다.

 

 "샤밀!"  (이맘을 직접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굉장한 결례였다고 한다.)

 

 하지만 샤밀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러시아군을 향해 계속 걸어나가서 항복하였다.

 나중에 러시아군이 왜 샤밀에게 고개를 돌리지 않았냐고 물었다.

 

 "바이산그로프는 절대 등 뒤에서 쏘지 않기 때문이다."

 

  바이산그로프는 샤밀이 항복한 뒤에도 결코 투쟁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백여명의 자기 부하들과 함께 몇만에 달하는 러시아군의 3중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였다.  부하들 대부분이 죽었지만 그는 끝내 탈출에 성공하였다.

 

 

 

 

 

 

 

  샤밀이 항복한 1년 뒤, 바이산그로프는 아직까지도 항쟁할 뜻을 함께하는 몇몇 나이브들과 함께 다시 봉기하였다. 솔타 무라드, "늙은 늑대"우마 두에프, 아타비 아타예프 등이 이에 가담하였다.  1860년 6월, 바이산그로프는 러시아군 소장이 지휘하는 병력을 격파한다. 이 전투의 승리로 베노이 지역은 다시 그의 휘하에 들어갔으며, 8개월 동안 러시아군에게 대항하였다.

 

  이와 동시에 우마 두에프는 아르군 계곡을 다시 장악하였고, 아타비 아타예프는 에브도키모스코에를 장악하였다. 과거 자신들의 나이브 시절 영역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반군들의 숫자는 불과 1500명이었고, 러시아군은 이에 신속히 대처하였으며 다시 수세로 몰아갈 수 있었다.

 

 결국 러시아군에 의해 반군들은 패배하였다. 바이산그로프는 몇몇 부하들과 함께 베노이 주변의 산지에 숨었다. 그러나 러시아군의 추격으로 꼬리가 밟혔고, 바이사그로프는 말이 죽게 되어 다시 러시아군의 포로가 되었다.

 

  1861년 봄, 바이산그로프 베노이스키는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다게스탄의 하산 유르트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그의 무덤은 산민들에 의해 베노이로 옮겨졌다. 그리고 러시아는 그의 반란에 대한 보복으로 일가족들을 시베리아로 유형보냈다.

 

 

 

 

처형장의 바이산그로프

 

  한쪽 눈과 한쪽 팔과 한쪽 다리가 없었지만 전장의 러시아군을 떨게 했던 바이산그로프. 그는 현재까지도 체첸인들에게는 전설적인 존재이며 면면히 내려오는 저항의 계보 중에서도 가장 추앙받는 존재가 되었다.

 

 

 

 

 

 

 

  

  -- 체첸인들은 샤밀, 만수르, 조하르 두다예프보다도 바이산그로프를 더 존경하고 칭송합니다. 원래는 이번에 현대전에 들어가야 맞지만, 워낙에 놀라운 인물이기에 한개 단락을 만들었습니다.

 


  출처 :  http://ru.wikipedia.org/wiki/%D0%91%D0%B0%D0%B9%D1%81%D0%B0%D0%BD%D0%B3%D1%83%D1%80_%D0%91%D0%B5%D0%BD%D0%BE%D0%B5%D0%B2%D1%81%D0%BA%D0%B8%D0%B9
            http://ru.wikipedia.org/wiki/%D0%98%D1%87%D0%BA%D0%B5%D1%80%D0%B8%D0%BD%D1%81%D0%BA%D0%BE%D0%B5_%D1%81%D1%80%D0%B0%D0%B6%D0%B5%D0%BD%D0%B8%D0%B5

            http://www.selard.com/

출처 : THIS IS TOTAL WAR
글쓴이 : jag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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