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읽 기/불굴의 용기

[스크랩] 코카서스의 늑대들 : 체첸 - 22. 함락

공만타 2009. 11. 26. 21:27

 

 

 

'신년 공세'의 상황도. 점선은 진격로. 실선은 증원로. 별모양은 격전지

 

 

 러시아 8군 사령관이었던 레브 로클린 중장. 과거 아프간 전쟁에도 참전했던 이 노련한 장군은 신년공세의 전례없는 상황 속에서도 침착하게 상황을 통제하였다. 그의 북동군 5천은 승기가 오른 두다예프의 체첸군의 공세를 버텨내며 그로즈니 북부 거점들을 사수한다. 그리하여 공황에 빠진 러시아군이 태세를 재정비하는 시간을 벌게된다.

 

  우선 러시아군은 전투에 부적합하다고 판명된 지휘관들을 정리하였다. 우선 서부군의 패트록 소장과 동부군의 스타스코프 소장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책임에 의해 물러나야 했다. 그 후임으로 서부군은 76 공수 사단장이던 이반 바비체프가, 동부군은 블라디미르 포포프 중장이 임명되었다.

 

 만신창이가 된 북부군은 로클린의 북동군에 흡수되었다. 그리하여 4개 공격 제대는 바비체프의 서부군과 로클린의 북부군, 포포프의 동부군으로 다시 편성되었다.  그리고 1월 4일과 5일 사이에 동부군은 북쪽으로 이동하여 사실상 북부군과 합류하여 전투를 수행하였다.  러시아군은 병력을 집중하여 서남쪽과 북동쪽이라는 2개 공격 제대로 그로즈니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로즈니 시내의 러시아군

   
     로클린 중장은 과거 러시아군이 치렀던 시가전, 특히 베를린 전투를 많이 참고하여 전투를 수행하였다. 그로즈니의 건물 하나하나를 소탕하고 각 건물마다 굳건히 사수하는 방식으로 차츰차츰 두다예프 대통령궁을 향해 진격하였다. 우선 무턱대고 전차를 진입시키는 방식을 지양하고 충분한 보병의 지원과 높은 고각을 사격할 수 있는 대공포의 포진 속에서 조심스럽게 전진하였다. 

러시아군은 밧줄과 사다리를 휴대하면서 건물 높은 층에 위치한 체첸군을 상대하였고, 필요하면 백린탄과 기화탄을 사용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특히 시가전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무기는  RPO-A 'Shmel' 로켓추진 화염발사기였다. 단발 형식의 이 휴대용 무기는 600미터 거리까지 기화탄을 날릴 수 있었기 때문에 체첸군이나 러시아군 모두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휴대용 대포' 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특히 건물에 매복한 저격수를 상대하는 데 효과적이었다고 한다.

 

 

 

 

 

 

RPO-A Shmel 로켓 추진 화염발사기

 

  
   신년공세의 실패 이후로 러시아군도 신중하게 시가전에 임하기 시작하자, 무기와 인력이 부족한 체첸군도 점차 밀려나기 시작하였다. 당시 그로즈니에 있던 4만에 달하는 러시아군을 상대한 체첸군의 수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러시아군은 1만 5천으로 추정했지만, 체첸군이 대부분 일시적으로 싸움에 참여하고 집에서 휴식하는 민병대들로 구성되고 계속 전투에 참가하는 정규군의 수는 매우 적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나치게 많은 수치다. 한 체첸군 지휘관은 상시 동원한 병력은 불과 400명 뿐이었다고 하며, 다른 자료를 종합해 볼 때 러시아군을 상대할 수 있었던 체첸군은 2천에서 6천 사이로 추정된다. 방어자가 최고 4배 유리한 것이 시가전이라지만, 충분한 화력과 공군력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러시아군을 대적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병력이었다.

 

 

 

 

1월 4일, 5일의 그로즈니 전투 상황도

 

  이미 100문 이상의 야포 (122mm와 155mm)와 로켓포를  그로즈니 주변에 포진한 러시아군은 1월 7일, 러시아 정교회 크리스마스 날에 전례없는 막대한 포격을 날렸다. 분당 15-20발로 추정되는 이 포격은 한시간이 넘게 지속되었고 체첸군의 통행을 제한하고 건물 거점을 파괴하는 데 상당한 효과를 발휘하였다. 또한 1월 9일부터 18일 사이에 지원온 러시아 해군 육전대는 7개 대대 병력으로, 90톤의 탄약과 군수물자도 같이 공수해 왔다고 한다. 그로즈니에 참전한 러시아군 중에 특히 체첸인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은 이 해군 육전대는 러시아군 공격의 선봉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체첸도 압하지아 전투에 참여했었던 아랍 무자헤딘들이 지원 왔으며, 심지어 발틱 연안의 리투아니아나 라트비아에서도 두다예프를 따라 지원왔다는 자료도 있다.

 

  1월 9일, 일주일에 걸친 격전으로 인해 양측은 다음날 08시부터 48시간의 휴전을 하기로 합의를 하였다. 포로를 교환하고 전사자들을 수습하는 시간을 갖자는 것이었지만 불행히도 휴전 시간 2시간도 안되어 다시 포격이 오고갔다. 러시아군 측이 사령부의 휴전 발표를 묵살했는 지, 아니면 체첸군 측이 먼저 도발했는 지, 아니면 애시당초 휴전 합의가 속임수였는 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다만 포로 교환과 전사자 수습은 어느 정도 이루어졌으며 대규모 공격도 휴전기간 동안은 서로 자제하였다. 그리고 러시아 총리 빅토르 체르노미딘은 이 기간 동안 중요한 발언을 하였다. 만약 체첸의 다른 마을들이 러시아군에 대한 적대 행위를 하지 않으면, 그 마을에는 러시아군의 군사작전이 없을 거라는 것이었다.

 

 

 

 

체첸군


   1월 12일 07시, 휴전 종료 1시간 전에 러시아군은 40문의 그라드 로켓포로  시가지 중심가를 향해 포격을 시작하였다. 3시간의 준비 포격으로 체첸군의 중요 거점들을 부드럽게 만든 뒤에 휴전기간 동안 준비했던 공격 작전을 수행하였다. 당시 러시아군은 두다예프 대통령궁에서 북쪽으로는 400미터까지, 서쪽으로는 1.5킬로미터까지 전진해 있었다. 자연히 로클린의 북부군이 공세의 핵심이 되었다. 포포프의 동부군이 최초 그로즈니 공세 계획 처럼 동쪽에서 남쪽으로 선회하여 시가지와 다른 곳의 연결을 끊은 뒤, 북쪽에서 주력을 투입하여 대통령궁을 점령하는 것이 로클린의 군이 할 임무였다.

 

   전투는 대통령궁 주변의 관공서 건물을 둘러쌓고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월 14일 로클린의 선두부대는 마침내 대통령궁을 직접 타격할 수 있는 위치까지 도달하였다. 아직까지도 대통령궁의 지휘실에서 그로즈니 방어전을 수행하는 마스하도프는 서서히 물러날 때가 왔다는 것을 느꼈다. 러시아군의 포격이 점점 가깝고 정확하게 대통령궁을 타격하기 때문이었다.

 

 

 

 

체첸 두다예프 대통령궁

 

   1월 18일, 로클린의 선두가 대통령궁을 공격하기 시작한 지 4일 뒤, 러시아군의 벙커버스터 한발이 건물 11층을 뚫어버리고 마스하도프의 지하 사령부에서 20미터 떨어진 곳까지 내려왔다.  마스하도프는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또 다른 기적을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그날 밤, 마스하도프는 대통령궁을 포기하고 전선을 이동하기로 하였다. 그로즈니를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가로지르는 순자강을 따라 제 2의 방어선을 구축하기로 한 것이다.

 

   철수는 18일 밤 10시에 소규모 병력이 순차적으로 이동하는 방식으로 수행되었다. 먼저 그로즈니 시 외곽에서 러시아군과 대치하고 있던 병력이 빠졌고, 다음 그로즈니 중심가에서 대치하고 있던 병력이 강을 건너고, 마지막으로 대통령궁에 있던 '경호대'가 11시에 빠져나왔다. 이 '경호대'는 복장이 원채 뒤죽박죽인 체첸군 사이에서도 검은 베레와 특유의 마크를 부착한 정예병력이었다. 샤밀 바사예프의 압하지아 병단은 이미 며칠전에 순자강을 건넌 상태에서 이들이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도록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체첸 '대통령 경호대'

 

 

  다음날인 1월 19일, 러시아 876 해군 육전대 는 대통령궁에 러시아 국기와 해군의 상징인 성 안드레이 깃발을 계양하였다. 적군의 상징적 건물을 마침내 함락시킨 옐친은 이제 그로즈니의 중요 군사 작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고, 이제 남은 '치안 확보' 임무는  내무군 사령관인 아나톨리 쿠리코프 장군이 수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1월 26일, 그로즈니 시내의 모든 러시아군의 통수권이 내무군 사령관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이 시점의 러시아는 그로즈니의 북쪽 3분의 1만을 장악한 상태였으며, 천연의 방어선인 순자강 남쪽의 체첸군은 아직 3천이 넘는 병력과 10대의 장갑차, 5대의 그라드 로켓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서부군 바비체프는 아직 그로즈니 남쪽의 보급로를 차단하지 못한 상태였고, 샬리의 러시아군 병기창에서 시내의 체첸군에게 향하는 보급망도 별탈없이 작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강건너 러시아군이 대통령궁을 둘러쌓고 '승전선언'하는 것을 냉소적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로즈니 시가지 지도. 짙은 색이 순자강 너머의 체첸군 영역

 

 

  순자강 남쪽의 체첸군은 가능한 모든 교량을 파괴하려고 했지만, 중심가의 철교는 폭약의 부족으로 인해 완전히 파괴하지 못했다. 대신에 그들은 가능한 모든 도하점에 부대를 배치하였고, 특히 저격수를 적절하게 포진해서 러시아군이 넘어올 엄두를 못내게 하였다. 체첸군 지휘관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많은 양의 저격총을 보유하지는 못했지만, 일반 소총을 단발 사격하기만 해도 러시아군이 저격수인 줄 알고 경계했다고 한다. 또한 다른 저격수들처럼 창가에 붙어있는 대신에 건물 중앙에서 가구 위에 올라가서 시야를 확보해 저격하는 방식을 써서 역저격을 쉽게 하지 못하게 하였다.

 

 

 

 

 

 

 

 

 

 사격하는 체첸군

 

 

  약 2주 가까이, 체첸군의 순자강 방어선은 잘 유지되고 있었다. 러시아군은 체첸군에 의해 요소요소의 도하점이 막혀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나 2월 3일, 보이코프 다리를 경계하던 체첸인 소부대가 마스하도프의 사령부에 보고도 하지 않은 채 자리를 떠 버렸다. 체첸군의 배치 상황을 면밀하게 살펴보고 있던 러시아군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100여대의 장갑차를 동원한 대규모 역습을 가했다.

 

 

 

 

 

체첸군

 

  당시 체첸군은 정규군처럼 칼같은 군율을 갖고 있지 않았고, 대부분이 부대를 먼저 구성하고 마스하도프에게 보고한 뒤에 '우리가 몇명이고 무기는 뭐를 갖고 있는 데, 이걸로 어디를 공격할까요?' 하는 식이었다. 그러면 마스하도프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사수하라는 식으로 명령을 내리지만, 그것을 어떻게 수행할 지는. - 심지어 임무를 수행할 지 여부까지도 -  해당 지휘관들이 알아서 판단하였다.  마치 독일군의 임무형전술처럼 그들은 자기 소속 지휘관의 개별적인 판단에 따라 움직이기가 쉬웠고, 이는 세부적인 전투에서는 높은 효율을 발휘했지만,  전략적인 측면에서는 중대한 위험이 있었다. 사령부에서 통제가 어렵고 중요한 순간에 병력 집결이 어렵다는 것이다. 

 

   순자강을 건넌 러시아군은 레닌 거리를 따라 진격해 내려갔다. 당시 미누트카 광장 근처의 2호 병원에 사령부를 설치했던 마스하도프는 어떻게 이런 상황이 초래됬는 지 경악하였다. 사령부에서 200미터 거리까지 러시아군이 접근한 상황에서 백방으로 부대를 집결시켜서 대응에 나섰다. 자칫 잘못하면 대통령궁 맞은 편 강가에 위치한 방어부대 주력이 포위될 위기였다. 보유하던 정예인 '경호대'까지 동원하여 상대하려 했지만 너무 경황없는 와중에 길을 잃어버렸다. 다른 체첸 부대도 혼란 속에서 통제가 불가능했다.

 

 

 

 

 

체첸군의 전차. 아군의 오인 사격 위험이 컸다고 한다.

 

 

  체첸인들은 보유한 전차 3대까지 동원하여 역습을 가했고, 사이하노프 거리까지 왔을 때 급한 불은 끌 수 있었다. 추가 진격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순자강 너머로 완전히 격퇴시키기 위해서는 더 강한 증원이 필요했다. 마스하도프의 보좌관이었던 후세인 이스하노프에 의하면, 당시 바사예프 휘하의 40명의 중무장한 병사들을 발견하고 그들을 전투에 투입하려 했지만, 바사예프의 명령없이는 이동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불행히도 당시 바사예프가 부재중이었기 때문에 이스하노프는  러시아군의 추가 돌파를 막을 수 없었다. 2월 5일, 국방부 장관 파벨 그라초프는 러시아군이 미누트카 광장을 확보했다고 발표한다. 순자강 방어선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체첸군은 이 한번의 공세로 큰 타격을 잆었고, 그로즈니 전투를 지속할 주요 거점을 거의 내주고 말았다. 거기에 그로즈니 남쪽의 주요 보급로도 2월 3일 이후로는 유지하기 힘들었다. 기칼로, 미크로라이언 등 그로즈니 외곽의 마을들도 하나하나 러시아군에게 함락되어, 체첸군이 그로즈니를 빠져나올 수 있는 후퇴로는 이제 체르노레치에와 그로즈니 남쪽 12번 지구를 연결하는 길 뿐이었다. 샤밀 바사예프의 담당지역이기도 한 곳이었다.

 

 

 

 

 

아슬란 마스하도프와 샤밀 바사예프

 

   마스하도프는 아직도 수백명의 병력을 보유한 샤밀 바사예프가 러시아군을 경계하는 동안에 12번 지구의 3번째 방어선으로 다시 병력을 배치하였다. 이 곳은 두다예프 대통령궁처럼 대형건물이 없는 곳으로 장기간 버티기 힘든 곳이었다. 그러나  체첸군은 쉽게 시가지를 내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로즈니를 벗어나 주변의 개활지에서는 러시아군을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잘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버텼다.

 

  그러나 대세를 돌릴 수는 없었다. 2월 8일, 이미 그로즈니 시가지의 80프로를 장악한 러시아의 추가 공세가 이어지기 전에, 체첸의 주요 사령부와 남은 중화기는 남쪽의 노보그로젠스키로 이동하였다. 아슬란 마스하도프도 이날 그로즈니를 빠져나가 아르군의 새로운 사령부로 이동하였다. 샤밀 바사예프의 압하지아 병단은 일주일 가량을 더 버티다가 마지막으로 그로즈니를 빠져나갔다고 한다. 체첸군 주력은 이때 빠져나갔지만, 그로즈니 시내의 산발적인 저항은 끈질기게 계속되었고 3월 7일이 되어서야 러시아군은 그로즈니 시내를 완전 장악했다고 선언할 수 있었다.

 

 

 

 

 

격전 중의 체첸군


   마침내 그로즈니 전투가 종료되었다. '공수부대 1개 연대가 2시간이면 점령가능한' 도시는 한달이 넘어서야 간신히 확보되었다. 러시아군의 사망자는 공식 통계로는 1,376명 전사에 408명 실종이지만, 러시아군 의무대에 의하면 가장 격전을 치렀던 로클린의 북부군에서만 1천명의 사망자와 5천명의 부상자가 전투 초기 3주 동안에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민간인 사망자는 옐친의 자문 위원이자 러시아 하원 인권위원회 책임자인 세르게이 코발레프에 따르면 2만 7천명이 넘었다.  대부분이 피난갈 친척이 없었던 가난한 그로즈니 거주 러시아인들이었다.

 

  소련 해체 이후 전대미문의 위기 속에서도 임무를 달성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로클린 중장은 'Hero of Russia' 훈장 수여가 추진되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러시아 국민들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어떠한 영광도 찾지 못했다"는 것이 훈장을 고사한 이유였다. 그는 군을 사임하고 자기 부하들을 무의미하게 희생시킨 옐친 행정부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다가 98년, 암살되고 만다.

 

   그로즈니를 내준 체첸군은 다음 방어선을 형성한다. 그것은 그로즈니 남쪽에 위치한 여러 거점 마을들 - 서전 유르트, 바무트, 아기스티, 샬리- 를  연결하는 방어진지였다. 그 뒤에는 그간 체첸인들이 러시아에게 대항하는 데 가장 든든한 원군이 되었던 코카서스 산맥이 버티고 있었다.

 

 

 

 

 

 

 

 

 

 

 

 

 


 출처 :  http://smallwarsjournal.com/documents/jenkinson.pdf
           http://smallwarsjournal.com/documents/iskhanovinterview.pdf
           http://www.globalsecurity.org/military/library/report/2002/MOUTThomas.htm
           http://www.globalsecurity.org/military/library/report/1995/chechpt3.htm
           http://www.globalsecurity.org/military/library/report/1995/fel.htm
           http://www.globalsecurity.org/military/library/report/1997/thomas.htm
           http://en.wikipedia.org/wiki/Lev_Rokhlin
           http://en.wikipedia.org/wiki/Battle_of_Grozny_(1994-1995)
           Moshe Gammer의 The Lone Wolf And the Bear 
           Sebastian Smith의 Allah's Mountains
           Yossef Bodansky의 Chechen Jihad
           Olga Oliker 의 Russia's Chechen Wars 1994-2000  Lessons from Urban Combat

 

출처 : THIS IS TOTAL WAR
글쓴이 : jag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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